행루(行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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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원(陵園)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군사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제작한 이동식 물시계.

개설

1437년에 만들어진 행루(行漏)는 이동식 물시계였다. 자격루가 고정식의 물시계인 데 비해, 행루는 능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또는 전방의 군사용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내용 및 특징

김돈(金墩)의 「간의대기(簡儀臺記)」에 따르면 구름 낀 날에는 때를 알기 어려우므로 행루를 만들었는데, 형체도 작고 제도도 간략하니, 파수호와 수수호가 각각 하나씩이고, 굽은 통으로 쏟으며, 물을 바꿔 넣는 시기는 자(子)·오(午)·묘(卯)·유(酉) 시를 이용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소정시의(小定時儀)·현주(懸珠)·행루는 각각 몇 건을 만들어 나눠서 두 경계선에 내주고, 나머지는 서운관(書雲觀)에 두었다. 행루는 물을 공급하는 파수호와 물을 받아 시각을 측정하는 수수호가 각각 하나씩으로 파수호의 물은 서로 다른 높이의 물이 수압 차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원리를 이용하는 장치인 갈오(渴烏)를 써서 수수호에 공급하였다. 수수호에는 눈금을 새긴 잣대를 띄우고 여섯 시간 동안 시각을 측정하고, 수수호가 가득 차면 파수호와 수수호를 바꾸어 사용하였다. 여섯 시간마다 수수호의 물을 교체하는 방식은 중국 물시계의 전형이다. 행루는 파수호 쪽 갈오의 한쪽 끝은 부자에 꽃아 파수호의 물이 줄어드는 대로 갈오가 부자와 함께 가라앉아 수수호에 일정하게 물을 공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437년(세종 19) 6월 18일에『누주통의(漏籌通儀)』와 더불어 행루와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현주일구(懸珠日晷)를 함길도·평안도 등의 각 변경에 보내어 군진(軍陣)에서 시간 측정에 정확을 기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세종은 경원(慶源)·회령(會寧)·종성(鍾城)·공성(孔城)에는 현주일구·행루·『누주통의』 각 하나씩을, 평안도도절제사 영에는 일성정시의·현주일구·행루·『누주통의』 각 하나씩을, 강계·자성·여연에는 현주일구·행루·『누주통의』 각 하나씩을 하사하였다.

변천

행루는 특히 왕실 제사에서 활용이 높았다. 세종은 1438년에 행루를 조금 더 작게 만든 소행루(小行漏)를 『누주통의』·소일영(小日影)과 함께 의주에 보내었다(『세종실록』 20년 2월 29일). 정조대에도 승지서용보가 남단(南壇)의 행사(行祀)는 시각을 알리는 예가 없어 일의 체면이 매우 소략하니, 해조로 하여금 행루 하나를 만들게 하여 매 제향 때에 진배(進排)하는 터전을 삼도록 해야 할 것이라 요청하여 정조가 허락하였다고 하나 실제로 제작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정조실록』 16년 8월 8일).

참고문헌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남문현, 『장영실과 자격루』,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이은성, 『역법의 원리분석』, 정음사, 1985.
  • 전상운, 『세종문화사대계』 2,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 남문현, 「혼천의, 자격루, 측우기」, 『한국사시민강좌』 23,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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