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십전(當十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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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제작하려고 했던 상평통보 1문의 10배 가치가 있는 동전.

개설

1678년(숙종 4) 조선 정부는 상평통보를 발행하여 국가의 공식 화폐로 삼고 전국적인 유통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상평통보의 원료가 되는 구리가 충분히 생산되지 않고, 왜로부터 수입되는 양이 줄어들면서 상평통보를 수요에 맞춰 제작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동전이 부족한 전황(錢荒) 현상을 해결하고자 상평통보 1문 가격의 10배 가치가 있는 십전통보를 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십전통보는 실제 제작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채 논의로만 그쳤다.

연원 및 변천

상평통보는 1678년(숙종 4)에 제작되어 유통이 시작되었는데, 1697년(숙종 23)에서 1731년(영조 7) 사이에는 원료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주전이 중단되었다. 원료의 지속적인 공급은 동전 제작에 중요한 전제조건이었지만 왜로부터 수입하는 구리의 양이 줄어들면서 상평통보의 제작도 원활하게 유지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가에서 재해를 구제하기 위한 정책을 펴기 위해서라도 동전의 주전은 현실적으로 급박하게 필요하였다. 이에 관에서는 1735년(영조 11)에 호조 판서송진명(宋眞明)이 구체적으로 당십전을 주전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당시에는 당십전이 바로 주전되지는 않았다. 이후 고액전의 유통에 대한 내용이 지속적으로 등장하였는데 정조대까지 지속되었던 당십전 주전 계획이 논의로만 그친 데는 대부분 원료 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 1750년(영조 26)에도 화폐제도의 개혁을 둘러싸고 심각한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당시에 동전의 원료가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쇠붙이로 만든 화폐인 철전(鐵錢)을 통용시키는 문제와 함께 당십전을 주조하여 고액화폐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후 1866년(고종 3) 대원군 집권기에 당백전이 주조되기 전까지 총 열다섯 차례에 걸쳐 당십전을 포함한 고액전을 주전하여 전황을 해결하려는 논의가 나타났다.

형태

당십전은 실제 제작되지는 않아 형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논의된 내용을 통해 당시에 계획한 당십전의 형태를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십전을 상평통보와 같은 형태로 제작하되 뒷면에 ‘십(十)’ 자를 표기하여 상평통보 1문의 가격보다 10배의 가격을 지닌다는 것을 표시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당십전은 무게가 10전에 해당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5~6전으로 정하여 주전 이익을 얻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정조실록』 17년 12월 1일).

생활·민속 관련 사항

당시 민간에서는 상평통보를 일상생활과 세납에 활용하고 있었다. 상평통보의 가치는 구리가 갖는 현물가치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질적인 가치가 액면가보다 낮은 당십전은 민간에서 유통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원유한, 『한국화폐사-고대부터 대한제국시대까지』, 한국은행 발권국, 2006.
  • 원유한, 「조선후기 화폐정책에 대한 일고찰 : 고액전의 주용논의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6, 한국사연구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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