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전(淸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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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유통된 청나라의 동전.

개설

청전은 청나라의 동전이라는 뜻이지만 중국에서 생산된 동전을 암묵적으로 통칭한다. 다른 명칭으로는 당전(唐錢), 북전(北錢), 연전(燕錢) 등이 있다. 기록상 나타나는 최초의 청전은 김육이 진위사로 다녀오면서 도입한 동전으로 그 규모는 15만 문 정도였다(『효종실록』 1년 6월 25일). 청전을 들여오는 것이 조선에서 직접 동전을 제작하는 데 드는 제반 비용보다 값이 저렴했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동전을 직접 제작하기보다는 청전을 수입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했다. 따라서 청전에 대한 수요는 상평통보 주전 이전부터 고종대까지 조선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17세기 후반에 상평통보가 널리 확산되어 유통되었지만 재료의 대부분은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으므로 청전 수입의 필요성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동전 수요가 증가할 때마다 부족한 공급량을 해결하기 위해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청전을 수입하여 유통시키려는 논의가 시기마다 나타났다.

연원 및 변천

조선에서 동전 사용이 확대된 것은 상평통보 주전 이후이다. 동전은 교환수단으로 민간에서 필요하였고 관의 입장에서는 재정 수단으로 이미 조선초기부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민간에서는 소액의 교환수단으로 그 활용이 점차 확대되었고, 정부에서는 재정 정책에 적극 이용하였다. 이처럼 동전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하여, 조선 내에서 생산하는 동전만으로는 그 수요를 충족해줄 수 없었다. 동전 제작에 필요한 주원료가 부족하였고, 주전 과정에서 동원되는 장인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임금 또한 큰 부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전의 완제품을 수입하자는 논의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일의 추진은 몇몇의 개인에게 맡겨 사무역으로 할 수 없는 문제로 국가가 주도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양난 이후 조선에서 화폐를 공급하기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일본의 화폐인 왜전(倭錢)이다. 1633년(인조 11)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동전을 수입하여 조선 내 동전 부족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하였다. 당시 왜공(倭貢)으로 수입했던 동전을 쌀로 환산해보자면 대략 4천 석 규모였다(『인조실록』 11년 10월 15일). 이후 효종대에는 중국으로 시선을 돌려 요동(遼東) 상인들로부터 동전을 수입할 계획을 세웠다. 이후 청전이 조선에 등장한 것은 효종대이다. 당시 청에 사신으로 갔던 김육이 중심이 되어 15만 문을 수입해서 평안도의 평양(平壤)과 안주(安州)에 시험적으로 유통시켰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의 강남 지역에서는 은 1냥당 국가에서 규정하는 비가(比價)가 은 1냥당 3,300~3,500문인 것에 비해 요동 상인들이 판매한 동전은 은 1냥당 812문의 비율로 판매되고 있었다.

청전을 도입해서 시장의 수요를 충당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화시키려는 노력은 영조대에 확대되었다. 1737년(영조 13) 박문수(朴文秀)는 동전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부득이 청나라의 동전인 북전(北錢) 수입을 요청하였다. 청전은 당시 북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재로(金在魯)의 경우 북전 수입은 밀거래하는 장사치의 행위와 다름이 없고, 또 국내에서 상평통보와 북전을 병행할 경우 백성들이 분별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북전 도입에 회의적이었다. 특히 북전 수입량이 증가하여 조선 내 점유율이 국내 통화를 넘어서게 되면 조선은 청에게 화폐에 대한 권리[貨權]가 종속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보았다. 이런 이유로 김재로는 박문수의 ‘북전유통론(北錢流通論)’을 반대하였다. 이에 박문수는 포기하지 않고 청전 수입이 단순한 동전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아니라 수입한 동전과 상평통보를 다시 녹여 주조하는 계획을 제시하면서 청전에 대한 유용론을 펼쳤다. 이와 같은 박문수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고, 조선은 상평통보를 확대 주전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대원군 시기에도 청전 수입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대원군은 1867년(고종 4)에 주로 관리들이 밀수입한 청전을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통용할 수 있도록 허가하기도 하였다. 대원군이 청전의 유통을 허가한 것은 당백전의 주조사업이 중단되어 국가의 재정 손실을 보충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전은 소재가치가 상평통보의 1/3~1/2에 지나지 않는 저렴한 주화였다. 1874년(고종 11)에는 조선 내에 청전이 300만~400만 냥에 달하여 상평통보 유통량의 30~40%에 육박하는 수치를 보였다. 대원군기에는 이전과 달리 청전 수입이 시행되어서 당시 부족한 재정을 확충하는 데 사용되었다.

형태

청전은 둥근 외형에 가운데에 사각 모양의 구멍이 뚫린 형태로 기본적으로 상평통보와 큰 차이는 없다. 당시 국내에 유통되던 청전은 가경통보(嘉慶通寶), 도광통보(道光通寶), 동치통보(仝治通寶) 등이었다. 동전에 새겨진 명칭이 다르기 때문에 세금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민간에서는 동전이 부족한 상황에서 교환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재주전을 통해 상평통보와 같은 형태로 제작하여 유통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청전은 은으로 환산한 가격이 조선에서 제작한 상평통보보다 훨씬 저렴하였다. 청도 왜로부터 구리를 수입하여 동전을 제작하였으므로 청의 동전이 규격대로 만들어졌다면 저렴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청전으로 알려진 동전은 값이 저렴한 만큼 품질이 열악하여 민간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특히 관서에서 청전을 세금으로 수납하지 않음으로써 신임도 또한 매우 낮았다. 청전은 결국 조선 내에서 제대로 사용되지 못했다. 오히려 갑자기 늘어난 물량은 물가 폭등을 야기하여 백성의 생활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청전 수입은 동전이 부족할 때마다 일각에서 지속적으로 대두되었지만, 실제 실행된 것은 대원군대뿐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원유한, 『한국화폐사-고대부터 대한제국시대까지』, 한국은행 발권국, 2006.
  • Von R. Glahn, 『Fountain of Fortun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