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병(銀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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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1101년(고려 숙종 6) 관에서 은을 호리병 모양으로 만든 고액화폐.

개설

고려중기에 대각 국사의천(義天)이 쌀과 포를 대신하여 유통시킬 화폐를 제작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관에서는 의천의 제안에 따라 은병을 만들어 유통시켰다. 그러나 은병은 원재료였던 은의 가격이 높았던 만큼 민간에서 교환수단으로 널리 활용되지 못했다. 이에 관에서는 은병의 유통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이듬해에 해동통보(海東通寶)를 제작하였다. 이후 은병은 고액권으로, 해동통보와 같은 동전은 소액화폐로 같이 유통되었다. 은병은 관의 유통책에도 불구하고 유통이 지체되자, 1331년(고려 충혜왕 1)에 종래의 은병 유통을 금지시키고 은의 순도를 높여 새로 소은병을 제작하여 대체하였다.

연원 및 변천

은병은 고려 숙종대에 고액화폐로 주조되었다. 관에서는 은의 함량과 중량을 보증하기 위해 은병에 이를 보증하는 표인(標印)을 찍어 유통시켰다. 은병은 수도인 개경에서 쌀로 15~16석, 지방에서는 18~19석의 가치로 유통되었다. 물론 매년 농사의 풍흉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병의 가격은 시전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경시서(京市署)에서 매년 조절해야 했다. 하지만 은병은 가치가 지나치게 높아 민간에서 유통이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관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1331년 은병의 크기를 줄이고 화폐 가치를 반으로 낮추어 유통시켰다. 이것이 소은병이다. 소은병은 1개에 5종포(五綜布) 15필의 가치로 다시 지정하고, 옛날에 제작한 은병의 사용을 금지하여 널리 유통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5종포는 품질이 중간쯤 되는 베로 닷새베로도 불렀다. 그러나 은병은 결국 민간에서 교환수단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시대에 들어 은병을 과거에 유통된 화폐의 하나로 거론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말에 유통이 멈춘 것으로 보인다(『정조실록』 16년 10월 19일).

형태

은병은 1근의 은으로 만들었고, 외형은 입구 부분이 넓게 확장되어 있어 민간에서는 활구(闊口)라고 불렀다. 은병은 원래 순은 1근으로 제조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은 12.5냥(약 469g)과 구리 2.5냥(약 94g)을 합금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때 구리를 합하여 주조한 것은 공인(工人)의 품삯에 충당하는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후 1331년(고려 충혜왕 원년) 은병이 고가여서 거래가 되지 않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작된 소은병은 크기를 줄이고 가치를 반으로 낮추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은병의 가치는 관에서 1개당 쌀로 정하여 민간에 유통되었다. 그 가격은 은병의 경우 평균적으로 은병 1개당 쌀 20석 정도에 해당되다 보니 민간에서 교환수단으로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이를 보완하여 소액 교환수단으로 등장한 소은병의 가치도 5종포 15필에 해당하여 민간에는 여전히 사용하기에 부담스러웠다. 따라서 민간에서는 은을 잘게 잘라 필요한 만큼 무게를 재서 사용하는 쇄은(碎銀)이 고가 화폐로 대신 사용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계림유사(鷄林類事)』
  • 한영달, 『한국의 고전』, 선출판사, 2002.
  • 채웅석, 「고려전기 화폐유통의 기반」, 『한국문화』9, 규장각한국학연구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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