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종(自鳴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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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반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 시계로, 미리 정해놓은 시각이 되면 자동적으로 소리를 내어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

개설

자명종(自鳴鐘)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정두원(鄭斗源)이 1631년에 서양 선교사로부터 받아서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는 조선이 서양과 시각 체계가 다르고 사용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실제 사용하였다기보다는 진귀성을 높이 샀을 것으로 보인다. 1669년(현종 10)에 송이영(宋以頴)이 자명종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자명종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혼천시계였다. 18세기부터는 관상감원들이 자명종을 제작했고 시간 측정에 이용했다는 기록들이 보인다. 또 18세기의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이 나경적(羅景績)의 도움을 받아 자명종을 만들었다.

내용 및 특징

1631년(인조 9) 7월 정두원이 명나라에 진주사(陳奏使)로 갔다가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육약한(陸若漢, [Rodriguez, J.])에게서 선물로 받아왔다는 기록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자명종 전래에 관한 기록이다(『인조실록』 9년 7월 12일). 자명종은 서양 시계로 전래되기 전까지 조선에서 제작된 적은 없었다. 『인조실록』에 자명종은 매 시간마다 종이 저절로 울리는 시계로 소개되어 있다. 김육(金堉)은 『잠곡필담』에서 자명종에 대해 “서양 사람이 만든 자명종을 정두원이 북경에서 가져왔으나 그 운용의 묘를 몰랐고, 그 시각이 상합(相合)됨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잠곡필담』에는 “효종 때에 밀양 사람 유흥발(劉興發)이 일본 상인이 가지고 온 자명종에 대하여 연구한 끝에 그 구조를 터득하였는데 기계가 돌아가면 매시 종을 친다. 자오시에는 9회, 축미시에는 8회, 인신시에는 7회, 묘유시에는 6회, 진술시에는 5회, 사해시에는 4회 치고, 매시의 중간에는 1회씩 친다.”고 하였다. 이로 볼 때 유흥발은 우리나라에서 자명종의 원리를 처음으로 체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자명종 제작에 관한 가장 확실한 기록은 1669년 10월에 관상감의 송이영이 자명종을 만들었다는 『현종실록』의 기록이다(『현종실록』 10년 10월 14일). 송이영은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자명종의 원리를 터득하여 혼천의를 결합한 저절로 울리는 시계를 제작하였다. 송이영의 자명종은 2개의 축을 동력으로 하여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시계 장치와 지구의가 설치된 혼천의가 연결되어 있어 시간과 천체의 위치를 동시에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만든 천문시계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물로 세계 시계 제작 기술 역사상 독창적인 천문시계로 평가되고 있다.

변천

1715년(숙종 41) 4월 관상감 관원 허원(許遠)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자명종을 본떠서 새로운 자명종을 만들었는데, 이것으로 보아서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기계시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23년(경종 3)에도 청나라에서 보내온 서양 문진종을 관상감에서 본떠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시계가 아주 정교하여 주야는 물론 흐린 날에도 시각을 추측하기 쉬워 관상감에서 청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로 보아 18세기부터는 관상감원들이 자명종을 제작했고 그것을 시간 측정에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세기의 실학자 홍대용이 나경적의 도움을 받아 만든 후종(候鐘)도 자명종의 일종이다. 고종대에는 서양인을 통해 자명종이 많이 유입되었다(『고종실록』 5년 4월 3일).

참고문헌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남문현, 「혼천의, 자격루, 측우기」, 『한국사시민강좌』23, 1998.
  • Needham, Joseph.,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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