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선국대군주보(大朝鮮國大君主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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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에 제작된 조선의 국새 가운데 하나.

개설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은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의거하여 종래의 통문관계를 폐지하고,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외교관계를 성립시켰다. 이에 따라 외교문서에 사용할 새로운 국새를 여럿 제작하였다. 대조선국대군주보는 이러한 시대 배경에서 만들어진 국새 가운데 하나이다.

연원 및 변천

개화기를 전후하여 조선은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끝내면서 종전의 책봉에 의한 국새인수제도를 폐지하고 국새를 국내에서 자체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1876년에는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를 제작하여 외교문서에 사용하였다. 1881년(고종 18)에는 일본에 신사(信使)가 가지고 가는 국서에 기존의 이덕지보(以德之寶)를 쓰지 말고, 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를 제작하여 쓰도록 하였고(『고종실록』 18년 윤7월 27일), 1889년(고종 26)에는 준명지보(濬明之寶), 동문지보(同文之寶), 흠문지보(欽文之寶), 명덕지보(命德之寶), 광운지보(廣運之寶)를 새로 제작하였다(『고종실록』 26년 8월 5일).

개화기를 즈음하여 조선에서는 대조선국주상지보, 대조선국보 외에도 대조선국대군주보(大朝鮮國大君主寶), 대군주보(大君主寶)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개화기에 제작된 국새의 종류와 형태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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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중국에서 반사된 국새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의 보문과 달라진 점은 ‘인(印)’ 자 대신에 ‘보(寶)’ 자로 대체하였고, 책봉 명인 조선국왕(朝鮮國王) 대신 대조선(大朝鮮)이란 국명을 사용하였다.

국새의 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기존의 국명인 조선 혹은 조선국에서 ‘대(大)’ 자가 추가되었음을 볼 수 있다. ‘대조선국’이란 명칭은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된 해인 1876년 12월 17일 일본과 부산구조계조약(釜山口租界條約) 체결과 관련한 실록의 기사에서 발견된다(『고종실록』 13년 12월 17일). 한편 국왕 혹은 조선국왕으로 칭하던 조선 군주의 호칭이 ‘대군주’라는 용어로 대체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대한제국 선포 이전까지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서구 열강들과의 수호조약에서도 모두 대조선국, 대군주의 호칭이 담긴 국새를 사용하였다.

개화기에 제작된 6과의 국새들은 현재 1과도 전하지 않는다. 언제 어떻게 유실되었는지 또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2006년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1971년 11월 1일부터 1985년 9월 20일 사이에 당시 궁중유물전시관에서 보관하고 있던 대조선국대군주보가 유실되었음이 밝혀졌다. 1985년 9월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궁·릉소장유물목록』에는 이 국새가 2과로 명시되어 있다. 아마도 대조선국주상지보나 대조선대군주보를 잘못 읽어 2과로 표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대조선국대군주보가 1980년대 당시까지 존재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형태

대조선국대군주보는 천은도금(天銀鍍金)에 거북손잡이가 얹혀 있다. 크기는 9.5㎝이며, 인면에는 소전(小篆)으로 ‘대조선국대군주보’ 8자가 양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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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문화재관리국, 『궁·릉소장유물목록』, 1985.
  • 성인근, 『고종 황제 비밀 국새』, 소와당, 2010.
  • 감사원, 「감사결과처분요구서-문화재지정 및 관리실태」, 200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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