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부일구(仰釜日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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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대에 만든 솥 모양의 오목해시계.

개설

세종 때의 대표적인 해시계로 앙부일구(仰釜日晷)라는 이름은 반구형의 대접과 같은 모양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그 뜻을 쉽게 풀이하면 오목해시계이다. 마치 모양이 하늘을 우러르는[仰] 가마솥[釜] 같다 해서 ‘앙부일구’라 이름하였다. 세종대 여러 가지 해시계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 앙부일구가 가장 널리 보급되었다. 그 이유는 다른 어떤 해시계보다도 앙부일구가 시간을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원

해시계는 태양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재는 자연시계이다. 태양의 일주운동, 실제로는 지구의 자전과 연주운동이라는 천문학적 운동을 통해서 하루와 일 년의 길이를 잰다. 눈으로 확인되는 태양의 운행 주기를 잰 시간이 시태양시이고 해시계는 시태양시를 재는 시계이다.

태양시 외에도 지구의 실제 운동을 관측해서 얻어내는 항성시라는 것이 있다. 항성일은 지구가 실제로 1회 자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항성일의 측정은 특정한 별이 천구상의 자오선을 통과해서 다음 자오선을 통과할 때까지의 시간을 재는 것이다. 그런데 항성일은 태양일과 비교하여 약 4분씩 빠르다. 하루 4분씩 1년 정도 쌓이게 되면 24시간이 된다. 결국 항성년과 태양년은 거의 하루 차이가 나는데, 정확하게는 365.2422평균태양일은 366.2422항성일이 된다.

태양시를 해시계로 관측했다면, 항성시는 별시계를 사용했다. 세종대에 처음으로 만든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가 바로 항성시를 재는 별시계이다.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해시계, 밤에는 별을 관측해 시간을 재는 주야 겸용 시계였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해시계를 만들어 사용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사상 인류가 선사시대부터 원시적인 해시계를 만들어 시간을 잰 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에서도 기원전부터 해시계를 만들어 사용했으리라 짐작된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와 백제에 ‘일자(日者)’, ‘일관(日官)’이라는 관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이 해와 관련한 일을 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해시계는 6~7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 해시계이다.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해시계는 현재는 일부분만이 남아 있다. 원을 24등분하고 그 위에 모두 24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이 해시계는 중국의 전통 해시계와 모양이 비슷하다.

해시계에 관한 한 중국은 우리나라만큼 발전하지 않았다. 날씨가 나쁜 관계로 발달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명나라 이후부터 해시계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해시계가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로 오랜 기간 활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우리나라에서 일구(日晷) 즉 해시계의 제작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조선 세종 때이다. 앙부일구를 비롯하여,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규표 등의 5종류가 이때 만들어졌다. 이처럼 세종 때에는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외에도 다양한 해시계들이 만들어졌다. 낮과 밤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주야 겸용의 일성정시의도 이때 창제되었다. 이런 해시계를 만드는 데는 장영실을 비롯하여, 정초, 김빈, 김돈, 이천 등의 공헌이 컸다.

앙부일구와 같이 오목형의 해시계는 중국 원나라의 천문학자인 곽수경이 ‘앙의(仰儀)’라는 이름으로 처음 고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제작되어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오목형 해시계는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다.

‘일구’는 해시계를 뜻하는 한자말로 해석하면 해그림자라는 의미이다. 해시계를 통해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해그림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세종대 여러 가지 해시계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 앙부일구가 가장 널리 보급되었다. 그 이유는 간편성 때문이다. 다른 어떤 해시계보다도 앙부일구가 시간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앙부일구는 1434년(세종 16) 처음 만들어져 서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되었다고 한다(『세종실록』 16년 10월 2일). 혜정교와 종묘는 한양의 중심도로가 있는 곳으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세종은 앙부일구를 만들어 궁궐에만 설치하지 않고 백성이 모두 볼 수 있게 했다.

세종은 시간을 모르는 우매한 백성을 위해 앙부일구를 다함께 볼 수 있는 시계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시계 위에는 글자 대신에 각 시간에 해당하는 12지신 동물의 그림을 그려 넣어 글을 모르는 사람도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다(『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앙부일구는 백성들을 위한 시계였던 것이다. 12지신이 그려져 있는 세종대 앙부일구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우리들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숫자가 새겨져 있는 조선 후기의 앙부일구이다.

형태

앙부일구의 기본 형태는 영침과 시반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침은 해그림자가 맺히는 뾰족한 막대기를 가리키고, 시반면은 영침과 해그림자를 받아 시간을 읽는 오목한 반구형의 구를 말한다.

이 시반면을 들여다보면, 오목한 내부 면에 시간과 절기 눈금이 새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해그림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데 이를 시계 방향이라고 한다. 시반면에 그려져 있는 눈금은 영침과 수직하게 13개의 절기선이 그려져 있는데 양쪽으로 12개씩 24절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춘·추분선을 정 가운데의 적도선으로 해서 맨 위쪽에는 동지선, 맨 아래쪽에는 하지선이다. 해그림자는 절기가 변함에 따라서 남북으로 이동하는데, 해그림자가 가장 긴 동짓날에는 가장 북쪽(윗쪽)의 동지선을, 하짓날에는 가장 남쪽(아래쪽)의 하지선을 따라서 그림자가 궤적을 그리게 된다.

절기선과 수직하게는 시간을 가리키는 선이 그려져 있다. 이 시각선이 그려져 있는 시반에는 12시 백각법에 따라 눈금을 새겼는데, 조선후기에는 12시 96각법으로 변경되었다. 시간을 잴 때 해시계의 바늘은 항상 북극을 향하게 해야 한다. 앙부일구는 절기선과 시각선에 맺힌 해그림자의 눈금을 그냥 읽기만 하면 되는 간편한 해시계였다. 그림자가 가리키는 시각선과 절기선을 읽으면 그것이 현재의 시간이고 절기이다. 따라서 절기와 시간을 동시에 알아낼 수 있는 앙부일구는 일종의 만능 역법시계라 할 수 있다.

변천

세종대에 제작된 앙부일구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없어졌다가 17세기 후반 현종~숙종 때 다시 제작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은 세종 때 만들어진 오목해시계와는 조금 다르다. 세종 때의 해시계가 서민들을 위한 공중용 시계였다면, 이때의 해시계는 대궐이나 명문 대갓집에 설치하기 위해 청동으로 만든 고급스런 오목해시계였다. 역법도 시헌력으로 바뀌어 기존의 100각이 96각으로 바뀐 것이 제작에 반영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강윤이 휴대용 해시계를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기존의 해시계에다 중세 서양의 형식을 가미한 것으로 크기가 성냥갑만 해서 소매 속에 넣고 다니기에 아주 좋았고, 시간도 매우 정확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해시계는 서양의 기계 시계의 영향을 받아 자(子), 축(丑), 인(寅), 묘(卯)라는 한자 대신에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졌다. 지금도 덕수궁과 조선호텔에 가면 이 해시계들을 볼 수 있다.

앙부일구는 세종대에 처음 제작된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해시계로 정착할 정도로 널리 만들어져 보급되었다. 현존하는 앙부일구만도 여러 개다. 휴대용 앙부일구까지 세면 10여 개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박성래, 「세종대의 천문학 발달」, 『세종조문화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 전상운, 「이씨조선의 시계제작 소고」, 『향토 서울』, 197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