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액(碑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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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서 표제를 이루는 부분.

개설

비의 머리 부분[碑首]이나 그곳에 쓴 표제를 말하며, 비석의 주인[碑主]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담은 곳이다. 비석은 대개 비의 몸체인 비신(碑身)과 그것을 받치는 비좌(碑座) 그리고 비의 머리라 할 수 있는 비수(碑首)로 구성되는데, 비액은 비수를 가리키기도 하고, 비수에 표제를 쓰는 가운데 부분을 가리키기도 하며, 표제 글씨를 가리키기도 한다.

비액은 일반적으로 해서(楷書)로 쓰는 비문(碑文)과 달리 대개 고대 서체인 전서(篆書)로 쓴다. 이는 비의 신성함과 비주(碑主)에 대한 존중을 표시하는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간혹 예서나 해서·행서·비백서로 쓰기도 하지만 대개 전서로 쓰기 때문에 전액(篆額)·액전(額篆)·두전(頭篆)·전수(篆首)·비전(碑篆) 등 여러 명칭이 있다.

전서로 비액을 쓰는 이유는 대략 3가지이다. 첫째는 전서 자체의 신성(神聖) 의식이다. 갑골문은 주술과 영험을 기록한 것이고, 청동기 명문과 진나라의 소전체는 조상의 숭배와 황권의 위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고(尙古) 의식으로 전통에 대한 향수와 계승을 표출하기에 적합한 서체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전서체의 심미(審美)의식이다. 전서는 고른 필획, 일정한 간격, 좌우대칭의 원리를 잘 갖추고 있어 영험과 숭배, 위엄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비석 글씨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특히 비액은 눈에 가장 잘 띄는 비의 상단 부분에 새겨진 표제로서, 그 비석의 주인을 단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쓰는 전서는 비의 의례성(儀禮性)과 심미성을 표현하는 데 적당한 서체이다. 또 일반적 서체와 구별되는 전서를 비문 글씨보다 크게 쓰고, 위아래로 쓰는 비문과 달리 옆으로 쓰는 점 등은 가시성을 높이는 효과도 갖는다.

연원 및 변천

비액은 석비의 출현과 함께 대두했는데 현존하는 최초의 비액은 동한(東漢) 시대의 안제(安帝) 2년에 세워진 ‘북해상경군비(北海相景君碑)’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의 비액은 비신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석판으로 되어 있어, 가운데 천공(穿孔)을 경계로 하여 그 상단에 표제를 새기고 하단에 비문을 새겼다. 동한 시대에 비의 형태가 본격적으로 갖춰지면서 비의 머리 부분에 제목도 쓰기 시작하였다. 비문은 당시의 통행체인 예서(隸書)로 썼고, 비액은 예서로 쓴 것도 상당히 있지만 대체로 이보다 오래된 서체인 전서로 많이 썼다.

그 후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비액이 비신과 분리되어 머리 부분에 안치되기 시작하였다. 비액의 정면에 표제를 새기고 그 주변은 용이나 화초 문양을 새겨 넣었다. 이 시기에는 해서로 된 비액이 많으며, 행서나 비백서로 쓰인 것도 간혹 보인다. 비가 성행한 당(唐)나라 시대에 이수(螭首)와 귀부(龜趺)가 갖추어지고 비액을 소전(小篆)으로 쓰면서부터 소전이 비액의 정식 서체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비액은 통일신라의 「태종무열왕릉비액(太宗武烈王陵碑額)」이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는 경주 서악리에 있는 태종무열왕릉의 앞에 있는데,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이 비는 귀부와 이수의 양식이 잘 갖추어진 당대(唐代)의 석비 양식을 수용하였다. 비액의 글씨는 기본적으로 소전의 결구에 기필 부분은 예서처럼 각지고 수필은 뾰족하게 한, 중국삼국시대오(吳)나라의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선국산비(禪國山碑)」의 서풍을 닮았고, 북위 시대의 「황제남순비(皇帝南巡碑)」·「온천송(溫泉頌)」·「휘복사비(暉福寺碑)」 등의 비액 서풍과 닮았다. 이러한 서풍은 「사천왕사지비액」 조각과 「천관사지비액」 파편, 그리고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비액(眞鑑禪師碑額)」 등 통일신라시대에 유행처럼 쓰였다. 고려초기에 최윤이 쓴 「영월흥녕사징효대사비」나 이환추가 쓴 「보리사대경대사탑비」·「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의 서풍도 가로획은 각지게 하고 세로획은 뾰족하게 마무리한 「태종무열왕릉비액」과 유사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태종무열왕릉비」처럼 비신과 귀부와 이수가 잘 갖추어진 형식이었으나, 9세기 후반부터는 비수가 관형(冠形) 또는 개형(蓋形)으로 변화되었다. 고려초기까지 이러한 형식이 이어지다가 12세기 말에는 이수 없는 비신 위에 우진각 지붕형으로 된 규두형(圭頭形) 석비가 나타나고, 14세기 말에는 옥개풍(屋蓋風)의 지붕형 이수 형식이 출현하였다. 조선초기에는 다시 당송시대의 이수를 가진 석비양식이 보이기도 하다가, 15세기 말경부터는 고려 말의 옥개형 석비 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간략한 양식이 주조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의 비액은 고려시대와 달리 소전을 정식으로 하였다. 체형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필획이 대체로 굵으며 원전(圓轉)을 강조하였다. 시기에 따라 약간의 풍격 변화가 있고, 간혹 고전(古篆)이나 장식된 전서체로 쓰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소전으로 일관하였다.

참고문헌

  • 이인숙, 「15세기 신도비 비액 전서 연구」, 『서예학연구』제18호, 2011.
  • 진복규, 「<태종무열왕릉비> 비액연구」, 『경주문화연구』9, 2007.
  • 梁披雲 主編. , 『中國書法大辭典』, 書譜出版社, 1985.
  • 周俊杰 等, 『書法知識千題』, 河南美術出版社,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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