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도(耕織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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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에 농사짓는 일과 누에 치고 비단 짜는 일을 그린 궁중 감계화(鑑戒畵) 또는 풍속화.

개설

농경사회에서 농업과 양잠은 사회경제적 기반이자 백성들의 생활수단이었다. 농업과 양잠을 일컬어 농상(農桑)이라고 했는데, 통치자는 농상을 잘 경영하기 위해 그 내용을 담은 그림을 정전과 침전 등에 설치하여 생활 속에서 늘 보아 관심을 늦추지 않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통치자는 농부와 누에치는 여인들의 어려움을 이해하여 스스로 근검절약하고 바른 정치를 하고자 노력하였다.

연원 및 변천

경직도는 중국의 남송 때 시어잠(時於潛)의 현령을 지낸 누숙(樓璹)이 고종에게 바치기 위하여 처음 그렸다고 하여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라고 하였다. 누숙경직도는 『시경』의 ‘빈풍칠월편(豳風七月編)’을 그린 ‘빈풍칠월도’를 모범으로 하여 보다 체계화시킨 것으로, ‘경작도(耕作圖)’와 ‘잠직도(蠶織圖)’ 두 권으로 이루어졌는데, ‘경작도’ 21장면과 ‘잠직도’ 24장면 등 모두 45개 장면이 그려졌다. 각 장면마다 오언율시의 경직시(耕織詩)를 전서체로 써서 각 장면의 왼편에 배치한 두루마리의 형식이었다.

‘경작도’는 제1도 침종(浸種: 씨 불리기)으로부터 시작하여 경(耕: 논갈이)·파누(耙耨: 거친 써레질)·초(耖: 고운 써레질)·녹독(碌碡: 고무래질)·포앙(布秧: 씨뿌리기)·어음(淤陰: 거름주기)·발앙(拔秧: 모찌기)·삽앙(揷秧: 모심기)·일운(一耘: 애벌매기)·이운(二耘: 두벌매기)·삼운(三耘: 세벌매기)·관개(灌漑: 물대기)·수예(收刈: 벼베기)·등장(登場: 볏단 쌓기)·지수(持穗: 도리깨질)·기장(箕場: 벼 까부르기)·농(礱: 맷돌갈기)·용대(舂碓: 방아찧기)·사(채 거르기)·입창(入倉: 창고들이기)의 순으로 되어 있다.

‘잠직도’는 욕잠(浴蠶: 누에씻기)·하잠(下蠶: 떨어놓기)·왜잠(餧蠶: 누에먹이기)·일면(一眠: 첫잠)·이면(二眠: 두 번째 잠)·삼면(三眠: 세 번째 잠)·분박(分箔: 잠상나누기)·채상(采桑: 뽕잎따기)·대기(大起: 잠깨기)·제적(提積: 걸어쌓기)·상족(上簇: 올림)·구박(灸箔: 잠상막기)·하족(下簇: 내림)·택견(擇繭: 고치고르기)·교견(窖繭: 고치저장)·연사(練絲: 실뽑기)·잠아(蠶蛾: 누에나방)·사사(祀謝: 제사)·낙사(絡絲: 실감기)·경(經: 세로짜기)·위(緯: 가로짜기)·직(織: 베짜기)·반화(攀花: 무늬넣기)·전백(剪帛: 비단자르기)의 순으로 되어 있다. 경작도는 화면의 3분의 2쯤의 지점을 가로지르는 논길을 기준으로 그 아래 펼쳐지는 논을 배경으로 표현되어 있다. 잠직도는 실내 공간임을 암시하는 집의 구조물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연원 및 변천

누숙경직도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시기는 1498년(연산군 4년)이었다. 성현(成俔)이 지은 봉교경직도후서(奉敎耕織圖後序)에 의하면 정조사권경우(權景佑)가 명나라로부터 가져온 누숙경직도를 성현이 연산군에게 바쳤다고 하였다. 청나라 때는 누수경직도를 다시 만들어 ‘패문재경직도(佩文齋耕織圖)’라 했는데, 조선 후기에는 패문재경직도의 영향을 받은 경직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원래 판화인 패문재경직도가 병풍의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나아가 한국화하여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보급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즉, 패문재경직도의 구성과 기법을 토대로 하되 소재는 우리나라의 인물과 풍속으로 대체된 경직도가 제작되었다.

아울러 원래 왕실용으로 쓰이던 경직도가 일반인의 수요에 의하여 만들어져 민화(民畫)에까지 많이 취급되었다. 19세기에 제작된 한양가(漢陽歌)에도 당시의 병풍에 경직도 병풍이 주요 품목으로 나와 있음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후기에 성행한 풍속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중엽부터는 풍속화와 제재 및 화풍상에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경직도에서 풍속장면이 증가하고 청록산수(淸綠山水)의 화풍에서 수묵담채(水墨淡彩)의 화풍으로 바뀌는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필자 미상의 ‘패문재경직도병풍(佩文齋耕織圖屛風)’과 필자 미상의 ‘경직도팔곡병(耕織圖八曲屛)’ 등이 있다.

형태

연산군대에 수용된 누숙경직도는 도화서 화원들에 의하여 병풍으로 제작되었는데, 병풍의 형식에 맞게 산수의 배경 속에 경작 장면을 배치하는 구성방식에다가 조선풍의 경직도로 수용되는 변화를 거쳤다. 조선 후기에는 패문재경직도가 수용되면서 경직도는 병풍은 물론 족자로도 제작되었다. 18세기 중엽부터는 풍속화와 제재 및 화풍상에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경직도에서 풍속장면이 증가하고 청록산수(淸綠山水)의 화풍에서 수묵담채(水墨淡彩)의 화풍으로 바뀌는 변화를 가져왔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경직도가 수용된 후 조선 후기에 민화, 풍속화에 경직 장면이 적극 반영되어 병풍이나 족자로 제작되는 풍속화는 대다수가 경직도풍으로 되었다.

참고문헌

  • 정병모, 「豳風七月圖流 繪畵와 조선조 후기 俗畵」, 『고고미술』174, 1987.
  • 정병모, 「조선시대 후반기의 耕織圖」, 『미술사학연구』192,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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