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영(日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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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드리우는 그림자란 뜻으로, 일영(日影)을 이용하여 시각을 측정하는 앙부일구(仰釜日晷)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를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됨.

개설

일영은 기본적으로 태양의 그림자를 뜻하는 일반 명사이다. 세종 때 만든 대규표(大圭表), 소규표(小圭表), 간의(簡儀), 소간의(小簡儀), 앙부일구, 일성정시의와 같은 천체 관측 기기들은 일영을 관측했다. 그래서 그중에서 특히 해시계로 사용된 앙부일구와 일성정시의를 지칭할 때도 일영이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일영은 간의, 소간의, 일성정시의, 앙부일구와 같이 해의 그림자를 관측하여 시각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사용되는 관측 기기와 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하여 일 년의 길이 즉 회귀년과 위도와 지구 자전축의 황도 경사각 등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등의 기능을 설명할 때 사용된 용어이다.

① 일영이 해의 그림자란 뜻으로 사용된 예는 다음과 같다. 세종 때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제작하여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일영을 관측하였다(『세종실록』 16년 10월 2일). 혜정교는 현재 서울 종로(鐘路)의 광화문우체국 근처에 있던 다리이고, 그곳에서부터 종묘 앞까지 나 있는 거리가 지금의 종로이다. 이 두 앙부일구는 백성들이 시간을 잴 수 있게 도성 번화가에 설치한 것이다.

문종 때에는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있던 간의대(簡儀臺) 및 정선방(貞善坊)·혜정교에 있던 앙부의 즉 앙부일구로 하짓날 일영을 측량하였다(『문종실록』 1년 5월 15일).

1547년(명종 2)에는 종묘의 동쪽 입구와 혜정교에 있던 두 앙부일구와 간의대에 있던 대규표와 소규표로 일영의 길이를 측량하였다(『명종실록』 2년 11월 2일). 이듬해인 1548년(명종 3) 하지에 혜정교의 앙부일구와 종묘의 앙부일구로 태양행도(太陽行度)를 측정하였더니 주영(晝影), 즉 낮의 일영이 모두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명종실록』 3년 5월 7일). 또한 1549년(명종 4) 동짓날에 혜정교와 종묘의 두 앙부일구와 간의대에 있는 대규표와 소규표로 일영을 측후하였다(『명종실록』 4년 11월 24일).

세종 때에는 장영실(蔣英實)이 경복궁에 보루각루 즉, 자격루를 만들었고, 중종 때는 창경궁에도 자격루를 한 벌 더 만들었다. 명종 때는 이 새로운 자격루의 시각을 해시계의 시각과 동조시키기 위해, 창경궁 남쪽의 종묘에 있던 앙부일구와 창경궁의 새로운 보루각(報漏閣), 그리고 외관상감(外觀象監)의 일영을 측정하여 교정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외관상감은 현재 창덕궁 서쪽 광화방(廣化坊) 즉 현재의 계동에 있었으며, 여기서의 일영은 해시계로 사용되는 관측 기기인데 아마도 세종 때 제작하여 관상감(觀象監)에 지급한 일성정시의일 것으로 보고 있다.

② 일영이 앙부일구를 뜻하는 경우가 있다. 앙부일구가 그림자를 측정하여 시간을 정하는 해시계이므로 일영이 해시계 기능을 가진 관측 기기를 뜻하게 되었던 것이다. 관상감과 궁궐 내부의 몇 군데에 앙부일구를 설치하였다. 특히 경복궁의 남서쪽 모퉁이 구역에 있던 관상감 근처 승정원 앞에 일영대(日影臺)가 있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를 줄여서 영대(影臺)라고도 불렀다(『중종실록』 8년 10월 22일).

이때의 관상감은 궁궐 담의 안쪽에 있어서 내관상감(內觀象監)으로 불렀다. 중종 때는 “어떤 도둑이 1백 년이나 전해 내려온 일영대를 뜯어 훔쳐 갔다.”는 기록이 있다(『중종실록』 28년 10월 18일). 일반 백성이 뜯어 훔쳐 갈 수 있는 것이라면 감시가 허술한 혜정교와 종묘에 있던 앙부일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명종 때의 앙부일구 관측 기록에 따르면 두 곳 모두 앙부일구가 존재해야 하므로, 중종 때 앙부일구를 잃어버린 후 복원했거나 다른 곳의 앙부일구를 가져다가 보충했다고 볼 수 있다.

종묘 앞에 설치한 앙부일구를 특히 일영대라고 부른 증거가 있다. 1758년(영조 34)에 영조는 ‘종묘 앞에 놓아둔 돌은 바로 일영대’라면서 그곳의 기원담을 신하들에게 들려준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열성조(列聖朝)가 미행하시다가 노파를 하나 만났는데, 그가 남편에게 이르기를, ‘세성(歲星)이 적성(賊星)에게 쫓겨 유성(柳星) 아래로 들어갔다.’고 하는 것을 보고, 그 노파를 서운관(書雲觀)에서 일할 수 있게 하였는데, 그 일영대는 그 할멈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영조실록』 34년 5월 4일).

그런데 몇 년 뒤인 1764년(영조 40) 어느 날, 영조에게 상소를 올린 백성 가운데 일영방(日影坊)에 사는 사람이 있었다. 이를 본 영조가 승지에게 그 동네의 이름에 대한 고사를 말해준다. 옛날 성종대왕이 미행하다가 일영대의 버드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는데, 어떤 노인이 밤에 천문을 보다가 괴이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자미성(紫微星)이 유성 밑에 숨어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성종이 그 노파를 서운관에서 일하게 하였고, 그 노파를 위해 일영대를 설치했으며, 또한 그 일영대가 있던 동네 이름도 그때 일영방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영조실록』 40년 9월 1일).

이러한 정보를 종합하면, 서울의 옛 지명 중 일영방에 일영대가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조선시대 지도와 각종 문헌 자료를 통해 그 일영방 또는 일영대계(日影臺契)가 오늘날의 서울시 중구 무교동 및 서린동 일대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현재 종로의 시작점인 종각 부근인데 이 근처에 혜정교가 있었다. 따라서 혜정교에 두었던 앙부일구를 일영이라 하고 그것을 놓아둔 대(臺)를 일영대라고 불렀으며 그것이 있던 동네를 일영방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영조는 “종묘 앞에 놓아둔 돌은 바로 일영대이다.”라고 하고 있는데(『영조실록』 34년 5월 4일), 이것은 당시에 혜정교 일영대는 앙부일구도 일영대 자체도 사라지고 다만 마을 이름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영조가 혼동을 일으킨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말기에는 종묘 앞에 앙부일구는 없이 그것을 놓아두었던 석대만 남아 있었는데 그 일영대 석대는 현재 탑골공원으로 옮겨져 보존되어 있다.

성종 당시에 일영대가 혜정교의 앙부일구와 그 대를 말함을 알려주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도성 안의 저자를 연지동(蓮池洞) 입구에서부터 돈의문(敦義門) 석교(石橋)까지 죽 분산해서 늘어놓자는 성종의 제안에 대해 호조에서 다시 건의하기를 “삼간병문(三間屛門)에서 돈의문 석교까지는 지세가 좁고, 또한 창덕궁·종묘·의금부의 앞길은 번잡하게 만들면 안 되므로, 저자를 일영대에서부터 연지동까지 좌우에 나누어 분산 배치하자.”고 하여 그렇게 따랐다고 한다(『성종실록』 3년 5월 11일).

지명들을 고증해보면, 여기의 일영대는 혜정교 부근에 있었음이 자명하다. 혜정교에서 연지동에 이르는 길이 바로 오늘날의 종로인 것이다. 즉 영조가 말한 성종 때의 일영 노파의 전설에 나오는 일영대도 바로 혜정교에 있었던 일영대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③ 일영이 일성정시의를 뜻할 때도 있다. 1437년(세종 19)에 일성정시의가 완성되어 4벌을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는 용으로 장식을 한 것으로 내정(內庭)에 설치했고, 3벌은 용 장식이 없이 만들었는데, 하나는 서운관에 주었고 나머지 둘은 각각 함길도와 평안도의 절제사 영(營)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저자 미상인 ‘경복궁도’를 보면, 경복궁 강녕전 동쪽에 규모가 제법 큰 대가 있고 거기에 일성의(日星儀)라고 적혀 있다. 즉 이것이 내정에 설치한 일성정시의이다. 나머지 하나는 현재의 계동에 있었던 외관상감에 있던 일영으로 본다.

한편 1437년에 일성정시의를 만들 때 그것이 너무 무거워서 군대에서 행군할 때 불편하므로 정극환을 없애고 소일성정시의(小日星定時儀)를 만들었다(『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이듬해인 1438년에 “소행루(小行漏), 누주통의(漏籌通義), 소일영(小日影)을 의주에 보내었다.”는 기록이 있다(『세종실록』 20년 2월 29일).

여기서 소일영은 낮에 일영으로 시간을 잴 수 있는 관측 기기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소행루는 물시계이고 소일영은 해시계이며, 누주통의는 절기별로 달라지는 물시계의 잣대 눈금을 정의한 것인데 『중성기(中星記)』와 함께 사용되어 물시계와 해시계의 시간을 일치시키는 데 사용되므로 이것들은 밤과 낮의 시간을 정하고 동기화하는 데 필요한 한 벌의 관측 기기들이기 때문이다.

세종 때 만든 천문 관측 기기 중에서 해시계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간의, 일성정시의, 앙부일구 등이 있다. 그중에서 앙부일구는 소(小)앙부일구를 만든 적이 없고, 소간의는 물론 해시계로도 사용할 수 있으나 주로 관상감에서 밤에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남는 것은 소(小)일성정시의뿐이다. 따라서 소일성정시의를 소일영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④ 『증보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보루각 근처, 시강원(侍講院)의 동쪽에 일영대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곳은 정확하게 오늘날 창경궁에 있는 보물 제851호 관천대(觀天臺)와 일치한다. 특히 ‘동궐도(東闕圖)’에 따르면, 그 일영대의 위치는 옛날 금루(禁漏)의 터 바로 남쪽, 춘방(春坊) 즉 시강원의 옆에 있으며, 거기에 표시된 계단식 대(臺)에는 일성정시의가 또렷이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관천대는 잘못된 이름이며 일영대 또는 일성정시의대(日星定時儀臺)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한편 ‘서궐도(西闕圖)’에 따르면, 경희궁에 있던 관상감의 계단식 대에도 일영대라고 적혀 있다. 이곳도 일성정시의를 놓아두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남문현, 『장영실과 자격루』,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 민병희·이기원·안영숙·이용삼, 「조선시대 관상감과 관천대의 위치 변천에 대한 연구」, 『천문학논총』 제25권 제4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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