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과(小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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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를 대과라 칭한 데 대비하여 부른 생원진사시의 별칭.

개설

생원진사시를 소과(小科)·감시(監試)라고도 부르는데, 소과는 문과와 함께 지칭할 때와 생원진사시 단독으로 부르는 경우로 구분되었다. 소과에는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와 나라에 경사가 생겼을 때 실시하는 증광시가 있었다. 초시와 복시 두 단계의 시험을 거쳐 합격하면 합격자에게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생원시 합격자는 생원, 진사시 합격자는 진사라 불렀다.

내용

소과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함께 지칭하는 말이었다. 생원시는 오경의(五經義)와 사서의(四書疑)를 시험 보았고, 진사시는 부(賦)·시(詩)·명(銘)·잠(箴)을 시험 보았다. 진사시를 먼저 보고 하루 거른 뒤 생원시를 실시하였다. 시험 과목과 시험 시기를 달리하지만 시험 절차와 방법, 방방의식은 동일하였다.

소과는 식년시와 증광시를 설행할 때 문무과와 함께 실시하였다. 식년시는 3년에 한 번씩 자(子)·오(午)·묘(卯)·유년(酉年)에 해당하는 해에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시험이었다. 증광시는 태종 즉위 기념으로 처음 실시하였다. 왕의 즉위 기념, 태자의 탄생, 왕비·왕세자의 책봉, 세자의 입학·가례(嘉禮), 원자(元子)·원손(元孫)의 탄생, 존호(尊號)를 올리는 것 등과 같이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였다. 경사가 합쳐질 때는 대증광이라 하여 인원을 늘려 뽑았다. 조선전기에는 왕의 즉위 원년에만 시행하였으나, 선조대부터 나라에 크고 작은 경사가 생기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증광시를 설행하였다. 후기로 가면서 설행 명분이 늘어났고 경사가 겹치는 합경(合慶)을 이유로 자주 설행하였다. 조선조 500여 년간 식년시 163회, 증광시 67회로 모두 230회가 설행되었다.

소과는 초시와 복시 두 단계 시험으로 구분되었다. 초시는 서울과 지방의 각 도에서 실시하는데 서울에서 보는 초시를 한성시(漢城試)라 하고 8도에서 도별로 보는 시험을 향시(鄕試)라고 하였다. 한성시의 정원은 생원·진사 각각 200명이고, 8도의 정원은 각각 500명이었다. 초시에 합격해야 서울에서 실시하는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복시에서 100명을 최종 합격자로 선발하는데, 1등 5명, 2등 25명, 3등 70명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합격시켰다.

합격자에게는 왕이 참석하는 방방의(放榜儀)에서 합격증서인 백패(白牌)를 수여하고 생원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변천

생원진사시를 소과라 부를 때 생원진사시만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문과와 같이 묶어서 ‘대소과(大小科)’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소과 혹은 대소과라 부른 경우가 보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대소과라 하여 생원진사시를 문과와 함께 지칭한 사례는 인조 연간에 이르러 보였다(『인조실록』 12년 1월 23일).

생원진사시만을 지칭하여 소과라고 한 경우는 현종 연간에 보이기 시작하여(『현종개수실록』 7년 3월 22일), 1682년(숙종 8) 이후에는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숙종실록』 8년 11월 11일).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것을 ‘소과에 올랐다(登小科)’라고 표현하였다(『숙종실록』 17년 5월 28일).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보면 생원진사시를 소과라고 지칭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생원진사시만을 지칭하거나 문과와 함께 ‘대소과’로 사용하는 사례를 자주 찾아볼 수 있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진사연구』, 집문당,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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