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곡(稅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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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조세로 거두어 재정 기반으로 활용하는 곡식.

개설

화폐 시장 경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세금을 현물로 납부하도록 하였다. 수많은 현물 중에서도 국가가 표준적으로 사용하고 관리하는 데에는 곡식이 가장 용이했다. 또한 조선은 농업이 산업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기에 조세 수입의 상당수가 곡식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세로 수취된 곡식, 즉 세곡은 당시 재정의 상당량을 차지하는 것이었으며, 세곡의 운영과 관리는 당시 재정 운영 전반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화폐 사용이 활발하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곡식이 화폐의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조세를 통해 거둔 곡식, 즉 세곡이 국가 재정의 근간이 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포(布)와 동전이 화폐로 기능하게 되었으나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국가 재원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세수(稅收)로 거두어들인 곡식이었다.

내용

조선의 세금은 농업 생산물인 전세(田稅)와 그 밖의 현물인 공물, 그리고 노동력 징발을 통한 역(役)과 역을 대신하여 납입하는 포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전세는 수전(水田) 즉 논일 경우엔 쌀을, 한전(旱田) 즉 밭일 경우에는 잡곡을 거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금으로 걷힌 쌀과 잡곡은 세곡으로 관리되었다. 세곡은 조운(漕運)을 통해 서울로 운반되거나 각 지방 창고에 보관되어, 중앙과 지방 관아의 경상비나 백성에 대한 진휼 등에 사용되었다. 서울과 각 지방에 저장된 세곡은 유사시에는 군량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2년 6월 14일).

변천

조선후기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되면서 수많은 공물이 결세화(結稅化)되어 곡식으로 납부되었다. 이를 대동미(大同米)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대동미 역시 세곡으로 인식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 이철성, 『17·18세기 전정 운영론과 전세 제도 연구』, 선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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