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복시(生員覆試)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9일 (토) 23:14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생원시의 최종 시험.

개설

생원복시(生員覆試)는 생원초시에 합격해야 응시할 수 있었다. 그 밖에 승보시(陞補試)·합제(合製)·공도회(公都會) 등 과시(科試) 합격자도 응시할 수 있었다. 시험 시기에 따라 식년시와 증광시로 구분되나 시험의 절차나 방법은 동일하였다. 합격자 100명에게는 합격증서인 백패(白牌)를 수여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처음에는 초시와 복시 구분 없이 예조가 집현전·성균관과 공동으로 시행한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였다. 조선왕조의 학교교육의 양적 확대 정책에 의하여 각 군현에 학교가 세워지고 문풍이 진작됨에 따라 지원자가 급증하게 되자 수험생 관리가 어려워졌다. 이에 1414년(태종 14)부터 초시에 합격한 사람을 다시 모아 복시를 치르게 하여 급락을 정하도록 하였다. 식년 전해인 상식년(上式年)에 초시를 보고 식년에 복시를 보아 두 차례의 시험을 거쳐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였다.

내용

문무과는 3단계로 이루어져 최종 시험으로 전시(殿試)를 두었지만 생원시는 복시가 최종 시험이었다. 초시인 한성시와 향시의 합격자, 승보시·합제·공도회 등의 과시 입격자를 대상으로 서울에서 치르는 복시를 설행하여 최종적으로 100명을 뽑았다.

복시에 응시하려면 녹명(錄名)을 해야 하는데, 그때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 있었다. 즉,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앞에 펴 놓고 읽게 하는 학례강(學禮講)을 통과해야 조흘첩(照訖帖)을 받았고, 이를 녹명소(錄名所)에 제출하여 확인을 받고 녹명을 하였다.

생원시는 식년시와 증광시로 운영되었다. 식년시는 3년에 한 번씩 자(子)·오(午)·묘(卯)·유년(酉年)에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시험이었다. 식년 전해 가을에 초시를 치르고 식년 봄에 복시를 치렀다. 생원복시의 시험 날짜는 사마방목에 의하면 2월 18~22일 사이에 실시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증광시는 왕의 즉위를 기념하거나 나라에 경사가 발생하였을 때 실시하기 때문에 시험 일자가 일정하지 않았다.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시행하였는데 실제로 3~4월과 9~10월에 가장 많이 실시하였다. 식년시와 증광시는 시험 시기만 다를 뿐 시험 과목, 선발 인원, 시행 방법은 같았다.

시험 장소는 분소법(分所法)에 의하여 1소와 2소로 나누어 치렀다. 이는 응시자가 시관과 상피관계(相避關係)에 있거나 부자가 한곳에서 시험 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세종대부터 시작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법제화하였다. 실제 시험 장소로는 예조·성균관·장악원·한성부·서학·동학 등이 이용되었지만 17세기 이후에는 1소는 예조, 2조는 성균관에 고정되다시피 하였다.

시험은 처음에는 예조가 주관하였으나 단종 이후에는 예조와 성균관이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생원복시의 시험 과목은 초시와 동일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사서의(四書疑) 1편과 오경의(五經義) 1편을 제술하도록 하였다. 사서의는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 중 한 문제를 내어 논문을 짓게 하는 것이었다. 오경의는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春秋)』의 한 구절을 제시하고 그 대의를 묻는 문제를 각 1편씩 출제하였다. 1783년(정조 7)에 반포된 『대전통편』에서는 춘추의(春秋義)를 제외한 사경의(四經義) 1편과 사서의 1편으로 축소하였다. 후기에 가서는 의(疑)와 의(義) 중에서 1편을 택일하도록 하였다.

시험이 끝나면 양소의 시관들은 시험장별로 50명씩 선발하여 번갈아 가며 등위를 매겼다. 복시에서 선발된 100명은 1등 5명, 2등 25명, 3등 70명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합격시켰다. 19세기 후반에 많은 인원을 뽑은 경우에 1등·2등은 변화가 없었고 증가된 인원은 모두 3등에 포함시켰다. 합격자에게는 합격증서인 백패를 수여하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변천

조선초에 정해진 생원복시의 시험 과목인 오경의, 사서의와 관련해서 1783년(정조 7)에 반포된 『대전통편』에서는 춘추의를 제외한 사경의 1편과 사서의 1편을 보도록 하였으나 실제로는 의(疑)와 의(義) 중에서 1편을 택일하도록 하였다. 19세기 후반 고종 연간에 이르면 합격 인원인 100명보다 훨씬 많은 인원을 뽑았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진사연구』, 집문당, 1998.
  • 조좌호, 「조선사마시고」, 『한국 과거제도사 연구』, 범우사, 199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