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정식(武科程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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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의 일정한 표준이 되는 방식이나 규정.

개설

조선시대에 무관(武官)을 선발하는 무과 시험은 세종대 거의 확립되었다. 무과에 대한 기본 규정을 무과정식(武科程式)이라고 불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과 과목이나 점수 채점 방식의 변화로 인하여 작은 변동 사항이 생기기도 하였다. 세종대 오례의 중 하나로 확립된 무과의 최종 시험인 무과전시의(武科殿試儀)도 무과정식의 일종이었다. 주로 『경국대전』·『속대전』·『대전통편』·『대전회통』 등의 법전에 기록된 무과 기본 규정을 말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건국 초기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원전(原典)과 속전(續典) 그리고 그 뒤의 법령(法令)을 종합한 『경국대전』에 기록된 무과의 기본 규정을 말하였다. 무과 시험은 공식적으로 무관을 선발하는 가장 중요한 시험이므로 이를 체계적으로 확립시키기 위하여 정식(程式)을 만들고 법제화하였다. 이를 통하여 무과 응시자들의 시험에 대한 공정성을 높이는 결과를 얻었다.

내용

무과정식에서는 무과의 이론 시험인 강서시험과 실기 시험인 무예시험의 방법과 채점 방식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였다. 이는 단순히 무예만을 익힌 무사를 뽑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관리로서 유학적 소양을 기본적으로 익힌 자를 무관으로 선발하려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경제육전』의 속전에 실린 무과정식을 보면 “무경(武經) 중에 삼서(三書)를 통하고, 경사(經史) 중에 일서(一書)를 통하고, 사서(四書) 중에 삼서(三書) 이상을 통한 자를 취하고, 오경을 강(講)하기를 자원하는 자도 들어준다.”라고 강서시험에 대한 무과 규정이 있었다. 또한 초장(初場)에서는 보사(步射)로서 편전(片箭)을 사용하고, 중장(中場)에서는 기창(騎槍)·기사(騎射)·격구(擊逑)에 모두 능한 자는 190분이고, 종장(終場)에서는 『무경칠서(武經七書)』와 사서(四書)·일경(一經)·『통감(通鑑)』을 다 통한 사람은 90분을 주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다.”고 하였다(『세종실록』 17년 6월 18일).

이러한 무과정식은 그대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당대 군사상 전술이나 무기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였다. 예를 들면, 이론 시험인 강서의 경우는 『경국대전』에 무과정식으로 규정되면서 『통감』·『병요』·『장감박의』·『무경』·『소학』 등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또한 실기 시험인 무예시험에서도 조선후기의 경우에는 조총과 마상편곤을 활용하는 편추(鞭芻)를 추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험 방법에서도 과녁을 설치하는 거리가 바뀌거나 사용하는 화살의 형태가 달라지기도 하였다.

변천

『경제육전』·『경국대전』·『속대전』·『대전통편』·『대전회통』 등 법전의 변화와 함께 무과정식도 일정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는 당대의 전술 체계와 무기의 변화를 무과 시험에서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참고문헌

  • 『무과총요(武科總要)』
  • 최형국, 「조선시대 기사 시험방식의 변화와 그 실제」, 『중앙사론』 24, 2006.
  • 최형국, 「조선후기 기병 마상무예의 전술적 특성」, 『군사』 70, 2009.
  • 임선빈·심승구 외, 『조선전기 무과 전시의 고증 연구』, 충남발전연구원, 1998.
  • 심승구, 「조선전기 무과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정해은, 「조선후기 무과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1993.
  • 최형국, 「조선후기 기병의 마상무예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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