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교시(監校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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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무과 회시의 주 시관.

개설

조선초기에는 무과 회시의 시관(試官)을 감교시(監校試)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감교시사(監校試使)와 감교시부사(監校試副使)로 정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무과를 시행할 때에는 감교시(監校試)와 동감교시(同監校試)로 삼았다. 그러나 감교시와 동감교시는 오래가지 못하고 1410년(태종 10)에 친시(親試)무과의 감교시와 동감교시의 제도를 폐지하면서 사라졌다.

내용

1402년(태종 2)에 무과를 처음 시행할 때, 무과의 시관은 감교시사·감교시부사라고 불렀다(『태종실록』 2년 1월 6일). 이는 문과의 시관을 지공거(知貢擧)·동지공거(同知貢擧)라고 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식년무과를 시행할 때에는 중추부와 문하부로 구성된 양부(兩府) 이상의 무관을 2명만 뽑아, 하나는 감교시로 삼고, 하나는 동감교시로 삼고, 기타 시관은 모두 문과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1402년(태종 2)과 1405년(태종 5)에는 감교관(監校官)과 동감교관(同監校官)이 무과 회시의 시관이었던 것으로 보아, 감교시와 동감교시를 감교관과 동감교관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태종대에 처음 무과를 시행할 때는 시관을 감교시사·감교시부사 또는 감교시·동감교시로 정하였다가, 최종적으로 무과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감교관과 동감교관으로 정비한 것으로 여겨진다.

변천

감교시는 동감교시와 함께 무과 회시를 주관하였는데, 무과 회시의 시관은 응시자의 당락을 좌우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무과의 감교시와 동감교시는 응시자와 좌주 문생의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1410년(태종 10)에는 친시무과의 감교시와 동감교시 제도를 폐지하고, 병조(兵曹)·의흥부(義興府)·훈련관(訓鍊觀)에서 공동으로 시취(試取)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0년 2월 19일). 이어 1413년(태종 13)에 문·무과의 좌주문생제를 폐지하면서 감교시제도 완전히 사라졌다.

참고문헌

  • 심승구, 「조선초기 무과제도」,『북악사론』 1, 1989.
  • 심승구, 「조선전기 무과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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