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복시(監試覆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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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 즉 생원진사시의 2차 시험.

개설

감시복시(監試覆試)는 생원시 복시와 진사시 복시로 구분되었다. 감시에서 복시는 최종 단계의 시험으로 해당 시험의 초시에 합격해야 응시할 수 있었다. 합격 인원은 각각 100명씩이었다. 진사시를 먼저 실시하고 하루걸러 생원시를 실시하였다. 시험 과목과 절차는 초시와 같았다. 복시 합격자에게는 왕이 참석하여 시행하는 방방의(放榜儀)에서 합격증인 백패(白牌)를 수여하였다.

내용

감시(監試)란 생원시와 진사시를 아울러 지칭하는 것으로 감시복시에는 생원시 복시와 진사시 복시가 있었다. 감시복시는 생원시 초시 합격자 700명, 진사시 초시 합격자 700명과 사학(四學)의 승보시(陞補試)와 합제(合製), 지방의 공도회(公都會)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생원시와 진사시 복시 응시자 중에서 최종 합격자로 각각 100명씩을 선발하였다(『효종실록』 2년 7월 25일).

복시 응시 전에 성균관의 박사 이하 관원이 예문관·승문원·교서관의 7품 이하 관원 및 감찰과 함께 『소학(小學)』, 『가례(家禮)』를 펼쳐 놓고 읽게 하는 학례강(學禮講)을 통과해야 했다. 예조에서 시험을 주관하였으며, 생원시와 진사시가 하루걸러 시행되는데 진사시를 먼저 보았다.

감시복시는 시험 시기에 따라 식년 감시복시와 증광 감시복시로 구분하였다. 식년시는 3년에 1번씩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시험이며, 증광시는 국가에 큰 경사가 있거나 경사가 겹쳤을 때 시행하는 시험이었다. 식년시 복시는 자(子)·오(午)·묘(卯)·유년(酉年)인 식년 봄에 실시하였다. 증광시는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시행하였다. 감시에서 식년시와 증광시는 시행 시기가 다를 뿐 절차와 합격 인원, 시험 과목은 모두 같았다.

시험 장소는 1소와 2소로 나누어 시행하였는데, 이는 시험 운영의 편의뿐 아니라 응시자가 시관과 상피관계(相避關係)에 있거나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장소에서 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대체로 1소는 예조, 2소는 성균관인 경우가 많았다. 시험 과목은 생원시는 오경의(五經義) 1편과 사서의(四書疑) 1편, 진사시는 부(賦) 1편, 고시(古詩)·명(銘)·잠(箴) 중 1편으로 각각 초시의 시험 과목과 같았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생원시의 경우 오경의 1편이 사경의 1편으로 범위가 축소되었고, 진사시의 경우 명과 잠을 폐지하고 부와 시 1편으로 간소화하였다.

복시 합격자는 왕이 참석하는 방방의에 참석하여 합격증서인 백패를 수여받았다. 생원시 합격자를 생원, 진사시 합격자를 진사라 불렀다. 생원과 진사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방방의가 끝나면 다음 날 합격자들은 생원 장원의 인솔 하에 왕에게 사은(謝恩)하고, 그다음 날에는 진사 장원의 인솔 하에 성균관에서 알성(謁聖)의 예를 올렸다.

변천

감시복시의 운영은 조선초에 정비된 『경국대전』의 내용에서 시험 과목이 간소화한 것 이외에 제도적인 변화는 없었으나 실제로 합격 인원에서는 변화가 있었다. 생원진사복시의 100명씩인 합격 인원은 잘 지켜지다가 1858년(철종 9)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고종 말년에 이르러서는 크게 증가하였다. 생원보다는 진사를 선호하는 경향을 반영하여 진사를 더 많이 뽑았다. 실례로 1891년(고종 28) 증광 감시복시에서는 생원 238명, 진사 559명을 뽑았고, 1894년(고종 31) 식년 감시복시에서는 생원 278명, 진사 1,055명을 뽑았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진사연구』, 집문당,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