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당(嘉靖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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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어당 북쪽에 위치한 목조 건물.

개설

1896년(고종 33)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慶運宮) 수리를 명하였고, 1897년(광무 1)에 경운궁으로 임어하였다. 1896년 당시에는 오로지 즉조당(卽阼堂) 하나뿐이었으나, 이후 왕이 거처할 수 있는 건물이 생겨났다. 이때 정전으로 활용되던 즉조당 동쪽에 침전 건물로 중층의 석어당(昔御堂)이 있었고, 그 북쪽에 가정당(嘉靖堂)이 건립되었다.

1904년(광무 8)에 경운궁의 함녕전(咸寧殿)에서 화재가 일어나 즉조당과 석어당을 비롯하여 영복당(永福堂)·함희당(咸喜堂)·함유재(咸有齋) 등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가정당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종실록』 41년 4월 14일).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여 빈전(殯殿) 의례를 행할 때에 고종의 재궁(梓宮)에 덮을 명정을 다시 쓰는 개명정(改銘旌) 의례를 가정당에서 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1907년(융희 1)~1910년(융희 4)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를 살펴보면, 가정당은 즉조당의 동쪽에 위치하는 석어당 뒷마당에 자리하였다. 가정당의 용도는 명확하지 않으나, 침전 뒷마당에 있는 작은 건물로 왕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창덕궁의 정침인 대조전 후원에도 가정당이 있었다. 이 건물의 건축 기록은 『시대일보(時代日報)』 1925년 6월 27일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이왕직(李王職)에서 수만 원의 건축비를 들여 창덕궁 내 후원에 건립하였는데, 왕과 왕비가 재미있게 소풍할 집으로, 그 이름을 가정당이라 하였다. 현재 창덕궁에 남아 있는 가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1925년에 창덕궁에 건립한 가정당은 덕수궁의 가정당을 옮겨지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덕수궁의 석어당 뒷마당에 있는 가정당의 용도도 창덕궁의 가정당과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변천 및 현황

1896년에 경운궁에 여러 전각을 건립할 때 석어당과 함께 건축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904년에 경운궁의 대규모 화재에도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아 1919년에 고종의 장례 때까지 활용되었다. 그러나 1928년에 출간된 『경성부도시계획조사서(京城府都市計劃調査書)』에 수록된 항공사진에서는 가정당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형태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참고문헌

  • 「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덕수궁지도(德壽宮地圖)」
  • 문화재청, 『덕수궁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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