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영대(日影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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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계를 올려놓기 위해 높이 쌓은 대.

개설

일영(日映)은 ‘해의 그림자’를 말하지만, 통상적으로는 해시계를 일컫는 용어로 쓰였다. 일영을 측정하는 기구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앙부일구(仰釜日晷)이다. 앙부일구는 1434년(세종 16)에 처음 만든 해시계로 김돈(金墩)이 지은 명(銘)에 따르면 “모든 시설에 시각보다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으니 모양이 가마솥과 같고, 지름에는 둥근 톱니를 설치하였으니 자방(子方)과 오방(午方)이 상대하였다. 구멍이 꺾이는 데 따라서 도니 겨자씨를 점 찍은 듯하고, 도수(度數)를 안에 그었으니 주천(周天)의 반이요, 신(神)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 각(刻)과 분(分)이 소소(昭昭)하니 해에 비쳐 밝은 것이요, 길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만들 줄을 알 것이다.” 하였다(『세종실록』 16년 10월 2일). 앙부일구는 2개를 만들어 하나는 혜정교(惠政橋)의 가장자리에 설치했고, 다른 하나는 종묘의 남쪽거리[南街]에 놓았다. 앙부일구를 설치하기 위해 높은 대를 쌓았는데, 이를 일영대(日影臺)라고 한다. 당시 일영대를 같이 만들었다는 내용은 사료에 보이지 않지만, 후대의 자료로 짐작하건대 일영대 역시 동시기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내용

1472년(성종 3)에는 한양 거리에 가득 들어찬 시장 가게를 일정하게 정비하는 사업을 실시했다. 최종적으로 ‘일영대에서부터 연지동 석교’까지의 거리 좌우에 시장을 설치하기로 했다(『성종실록』 3년 5월 11일). 여기에 등장하는 일영대는 혜정교에 설치한 일영대를 말한다. 혜정교에 일영대가 설치됐기 때문에 혜정교 인근 마을을 일영방(日影坊) 또는 일영대계(日影臺契)라고 불렀다. 이 지역을 일영방이라고 칭한 이유에 대해 영조는 “옛날 성종대왕이 미행(微行)을 하시다가 일영대의 버드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는데, 어떤 노인이 밤에 천문을 보다가 괴이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자미성(紫微星)이 유성(柳星) 밑에 숨어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고 하였다. 그 대(臺)가 옛 대궐인 경복궁 밖에 있었는데, 방의 이름도 이 때문에 그렇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하였다(『영조실록』 40년 9월 1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일영대는 매우 이른 시기에 폐지된 것으로 여겨진다. 영조대에는 왕이 종묘 앞에 있는 네모난 돌이 무슨 용도인지 알고 있는가를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다(『영조실록』 34년 5월 4일). 하지만 아무도 돌의 용도를 알지 못했고, 영조가 이것이 일영대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승정원일기』 1852년(철종 3) 6월 7일자 기록에는 명확히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일영대가 이미 폐지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두 곳 모두 앙부일구가 이미 사라졌고,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다만 종묘 문 앞에는 하나의 네모난 돌이 있는데, 이것이 앙부일구를 안치하는 대석이라 전한다고 했다. 종묘 앞에 위치한 일영대는 그 후에도 계속 존치되었다.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1898년(고종 35)에 전차궤도를 설치하면서 일영대를 땅에 묻었고, 1930년 6월에 이것을 다시 발견해서 오늘날의 탑골공원으로 이건했다고 기록되었다. 이 일영대는 지금도 탑골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다른 사료를 통해 또 다른 일영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기에 만들어진 『궁궐지(宮闕誌)』에 경복궁과 창경궁에 일영대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경복궁」편에 따르면 영추문(迎秋門) 남쪽에 9칸짜리 누국(漏局)이 있고, 그 남쪽에 일영대가 있다고 했다. 경복궁에 일영대가 있는 모습은 「북궐도형(北闕圖形)」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창경궁」편에는 동룡문(銅龍門) 안쪽에 일영대가 있다고 기록되었다. 이곳에 일영대가 위치한 모습은 「동궐도형(東闕圖形)」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창경궁의 일영대에 대한 내용은 『승정원일기』 1783년(정조 7) 2월 26일자 기록에도 등장한다. 창경궁 일영대는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가는 출궁로에 위치하였다. 당시 정조가 춘당대에 거둥하였는데, 어가가 춘당대에서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가던 중 일영대 앞에서 이재학(李在學)에게 “일영대는 소중한 것인데 기울어지고 무너져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속히 고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동궐도형」보다 훨씬 시대가 앞서는 사료인 「동궐도(東闕圖)」에서 같은 위치에 천문대와 유사한 높은 대가 그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으로만 묘사했고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일영대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동궐도」에 묘사된 일영대 상부에는 앙부일구가 아닌 다른 기물이 그려졌다. 그림만으로 판단하면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인 것으로 보인다. 일성정시의는 해시계에 더하여 별의 위치를 통해 밤의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로 앙부일구와 마찬가지로 세종 연간에 만들어졌다. 김돈(金墩)이 지은 「일성정시의명병서(日星定時儀銘幷序)」가 『동문선(東文選)』에 전하는데 “낮에는 일구(日晷)를 추적하여 때를 짐작하므로 그에 대한 기구는 이미 마련하였거니와, 밤에는 『주례(周禮)』에 별(星)로써 밤을 분간한다는 문구가 있고 원나라 역사에도 별로써 정한다는 말은 있으나 어떻게 헤아린다는 방법은 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명령하여 주야의 시각에 대한 기구를 만들게 하고 이름을 일성정시의라 하였다.”고 했다.

창경궁의 일영대가 오늘날 창경궁에 있다. 창경궁 관천대(觀天臺)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보물 851호로 지정되었다. 1688년(숙종 14)에 영의정 겸 관상감 영사(領事)남구만(南九萬)이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에 축조했다가 후에 창경궁으로 옮겼다고 한다. 『경성부사』에 따르면, 1931년 5월에 원위치에서 창경원 내 수금실(水禽室)로 이건했다. 이후 1980년대 후반에 창경궁을 복원하면서 「동궐도형」 및 「동궐도」를 참조해 원래 위치로 다시 옮겨 설치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誌)』「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북궐도형(北闕圖形)」
  • 경성부, 『경성부사(京城府史)』 제1권, 1934.
  • 문화재관리국, 『창경궁중건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89.
      1. 그림1_00017958_「동궐도」, 일영대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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