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西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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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태종대에 돈의문 밖에 조성한 연못.

개설

서지(西池)는 태종대에 돈의문 밖 모화루 남쪽에 판 연못이다. 초기에는 외국 사신 영접의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연꽃의 아름다움으로 천연정과 함께 한양의 명승지로 유명했다.

위치 및 용도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었던 연못이다. 조선초기에 주로 사신을 영접하던 장소로 활용되었다. 서지는 「국도팔영(國都八詠)」에서 ‘반지상련(盤池賞蓮)’이라 하여 연꽃으로 유명했다.

변천 및 현황

서지는 1408년(태종 8) 4월 22일에 돈의문 밖 서북쪽에 있는 모화루 남쪽에 조성되었다(『태종실록』 8년 4월 22일). 공사를 시작할 때 연못의 수원이 부족하여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태종실록』 8년 5월 7일). 연못에는 개성숭교사(崇敎寺)의 연꽃을 옮겨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8년 5월 19일). 조선초기에 ‘모화지(慕華池)’로 불리기도 했으며, 사신을 영접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세종실록』 7년 5월 18일). 이때 명칭은 모화관(慕華館)과 연계된 명칭으로 볼 수 있다.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서지의 수심이 깊어 인명 피해를 걱정할 정도로 수량이 많았다(『세종실록』 6년 4월 14일). 정조대에는 서지에 인접하여 경기감영 중군영 내에 천연정을 조성했다. 이후 서지와 천연정은 한양의 명승지로 인식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죽첨공립보통학교 부지로 결정되면서 인근 하수도공사에서 나온 흙으로 연못을 메운 후 학교를 조성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오늘날 금화초등학교 터이다.

형태

서지는 돈의문에서 의주로 방향에 위치하며, 돈의문과 실제로 연결되지는 않고 계곡부에 인접하였다. 서지는 길이가 380척, 너비가 300척에 이르는 직사각형이며, 깊이는 2~3장에 이른다고 했다(『태종실록』 8년 5월 7일). 세종대에 모화관 남쪽에 낮은 담을 쌓았고, 연산군대에도 반송지에서 언덕까지 싸리울타리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연산군일기』 11년 3월 30일). 중종대와 명종대에도 담장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중종실록』 20년 3월 15일)(『명종실록』 20년 2월 21일). 「경기감영도(京幾監營圖)」를 보면, 서지 가운데에 원도가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참고문헌

  • 길지혜 외, 「조선시대 한양도성 연지(蓮池)의 입지 및 공간적 특성 고찰」,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3권 4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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