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아진(大波兒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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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벽동군에 속한 만호진.

개설

대파아진은 평안도 벽동의 압록강 연변에 설치한 관방시설로 세종대에 처음 운영되었다. 그러나 청 건국 이후 중요성이 낮아졌고, 결국 고종대에 혁파되었다. 지리적으로 건주여진(建州女眞)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자연 환경

대파아진은 동쪽으로 신리북산을 넘어 동하리(소파아진), 서남쪽으로 벽동군 소재지와 접한다. 북쪽으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이 있다. 남서쪽은 피난덕 산줄기로 이루어져 있고, 동쪽은 이의 지맥이 자강도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송계천(松溪川) 등 주요 하천은 모두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경지는 전체 면적의 6.7%에 불과하여 농업이 발전하지 못하였다.

변천 및 현황

대파아진은 1442년(세종 24)에 평안도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이숙치(李叔畤)가 압록강 연변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호를 더 설치하자고 주장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세종은 대파아를 비롯한 무창군(茂昌郡)의 보산(甫山)부터 의주(義州)의 보진장(寶鎭場)까지 19곳에 만호를 배치하였다(『세종실록』 14년 1월 17일). 그리고 1446년 2월부터 4월 사이에 평안도 연변에 행성(行城)을 쌓을 때, 대파아진부터 송림구자(松林口子) 구역이 완성되었다[(『세종실록』 28년 2월 29일) (『세종실록』 28년 4월 11일). 대파아진을 비롯한 연변 지역은 거주하는 인원이 적어서 여름에는 농민들이 지키고, 겨울에는 가까운 벽동읍성(碧潼邑城)과 같은 거점 지역에 입보(入保)하였다.

한편, 이곳은 건주여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정보 수집을 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6년 5월 11일). 하지만 후금이 입관한 후 청에서 현(縣)을 두고 초소를 철수하여 변경에서 봉화(烽火)를 올릴 일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진보가 거의 다 쇠락하여 군사도 몇 명 안 되므로 제대로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883년(고종 20) 4월에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어윤중(魚允中)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혁파되었다(『고종실록』 20년 4월 4일).

형태

대파아성은 벽단군에서 북쪽으로 20여 리(약 8㎞) 떨어진 압록강 변에 설치되었다. 1492년(성종 23)에 대파아성을 쌓았는데, 높이 8척(약 2.4m)에 둘레가 961척(약 291m)이었다(『성종실록』 23년 3월 30일). 한편,『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석축의 둘레 480척(약 154.5m), 높이 4척(약 1m)이라고 하고, 『만기요람』에도 석축의 둘레가 480척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조보감(國朝寶鑑)』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여지도서(輿地圖書)』
  •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북한편)』2,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2013.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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