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추문(景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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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서쪽 궁장에 설치한 문.

개설

창덕궁 서쪽 궁장에는 3개의 문을 설치했다. 남쪽에는 금호문(金虎門)을 두어 창덕궁의 서문으로 사용했다. 창덕궁에 드나드는 대부분의 관리는 금호문을 이용했다. 북쪽에는 요금문(曜金門)을 두었는데, 궁궐 나인들은 이 문을 통해 창덕궁에 출입했다. 금호문과 요금문 중간에 설치한 문이 경추문(景秋門)이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창덕궁 서쪽에 경추문이 있는데 이 문만은 대장이 분부하여 군사를 동원할 때에만 열게 되므로 언제나 닫혀 있다.”고 했다.

내용

창덕궁을 처음 건립할 때 서쪽 궁장에는 금호문과 요금문만 두었다. 금호문은 서쪽 궁장의 남쪽 끝부분에 위치했고, 요금문은 서쪽 궁장의 중간 부분에 위치했다. 금호문과 요금문 사이에는 따로 출입문이 필요하지 않아 설치하지 않았다. 그런데 1655년(효종 6)에 만수전(萬壽殿)을 건립하면서 궁장 서쪽에 또 다른 문이 필요하게 됐다. 만수전은 왕대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전각이다.

원래 장렬왕후는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 거처하였다. 하지만 계속 몸이 편찮고 1652년(효종 3)에 이 전각에서 흉물들이 발견되면서 거처를 창덕궁 수정당(壽靜堂)으로 옮겼다. 하지만 수정당이 산을 등지고 땅이 비좁아 오래 거처하기에 적당하지 않아 새로 만수전을 건립하기로 했다(『효종실록』 6년 11월 17일). 만수전을 건립할 곳은 인정전(仁政殿) 서쪽 편에 위치한 옛 흠경각(欽敬閣) 터였다. 하지만 곧 바로 만수전을 건립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김육(金堉)은 3가지 이유를 들어 만수전 건립을 반대했다. 첫째는 만수전이 자리 잡게 될 터에 관한 것이었다. 흠경각 자리는 산기슭에 노출되어 깊숙하지 못하며, 금호문과 요금문이 좌우에 있고 서영(西營)과 북영(北營)이 밖에 있어 달리는 거마 소리가 시끄러워 새벽부터 저녁까지 소란스럽기 때문에 왕대비가 거처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예와 관련한 것이었다. 동양에서 왕대비전은 항상 대내(大內)의 동쪽에 두는 것이 원칙으로 이를 동조(東朝)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만수전은 대내의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예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흠경각과 관련한 것이었다. 흠경각은 세조 때 건립한 것으로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곳이며 제왕이 백성을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건물인데, 이것을 헐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효종실록』 6년 12월 4일). 김육의 상소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추문은 만수전 건립과 동시에 만든 문이다. 김육이 만수전 건립을 반대한 첫째 이유를 통해 경추문이 만들어진 경위를 짐작할 수 있다. 즉 경추문은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문이 아니라 오히려 궁궐 바깥에서 이동하는 관리 또는 군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수전과 경추문 건설에 대한 것은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에 전한다.

『승정원일기』 1657년(효종 8) 3월 25일자 기록에는 궁궐의 서쪽 담장과 경추문을 만드는 일이 이미 완료되어 수직군사를 정하는 내용이 실려 있어 이때 경추문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1657년 4월 2일에는 왕대비가 만수전으로 이어했다. 하지만 1687년(숙종 13) 9월에 만수전이 화재로 소실되어, 왕대비는 다시 창경궁 통명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만수전은 복원되지 못했다. 만수전이 없어지면서 경추문의 역할 역시 사라졌다. 비록 경추문은 그대로 유지됐지만 더 이상 문을 개폐할 필요가 없어졌다.

참고문헌

  •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
  • 『한경지략(漢京識略)』
      1. 그림1_00017953_「동궐도」, 창덕궁 서쪽 궁장과 경추문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