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제교(永濟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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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의 금천을 가로지르는 석조 홍예교.

개설

영제교(永濟橋)는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흥례문(興禮門), 근정문(勤政門)을 연결하는 진입축의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의 마당에 있는 석조 홍예교이다. 궁역의 북쪽에서부터 흘러 들어온 금천을 건너는 다리이다.

위치 및 용도

영제교는 경복궁의 진입축인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勤政殿)의 동선으로 볼 때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는 마당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는 금천에 놓였다. 경복궁 금천은 북쪽의 백악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이 북쪽 궁장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 물줄기가 경회루(慶會樓)와 궐내 각사 영역을 감고 돌아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 마당의 동서 행각을 관통하여 지나가며, 이 사이에 영제교가 있다. 이 금천은 명당수로서 영제교 역시 내밀한 궁궐의 공간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경계 요소로 작용한다. 금천 어구의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고 유속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한편 영제교와 같은 궐내 석교들은 공간의 연결, 영역의 구분이라는 기본적인 역할 외에 점경물로서의 역할도 겸하였다.

경복궁 외에도 각 궁궐에는 금천과 석교가 있다. 창덕궁의 금천교(金川橋),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橋) 등이 그것이다. 이들 다리는 모두 조하, 조참 등의 궁중 의례에서 행례 위치의 기준점이 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해당 규정에는 조하 시의 백관 문외위 혹은 조참 시의 백관 행례위가 근정문과 흥례문 사이의 마당에 설치되는 것으로 규정되었는데, 영제교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문무관 1품에서 2품까지가 도열하고 남쪽에는 3품 이하의 관원이 섰다.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고이(考異)」편에는 경복궁 부재의 상황에서 경복궁을 기준으로 설정된 위치 기준점을 여타 궁궐에서 대체할 수 있는 규정이 실렸는데, 주로 경복궁 광화문,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경희궁 흥화문(興化門)과 같이 문의 위치를 대체하였다. 반면에 영제교·금천교·옥천교 등의 진입축의 석교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 놓였는데, 창덕궁의 금천교는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에, 창경궁의 옥천교는 홍화문과 명정문(明政門) 사이에 있어 경복궁에서의 의례 규정을 그대로 대입하는 데 무리가 있어 조금씩 다른 규정으로 정의된다.

변천 및 현황

영제교는 경복궁이 창건된 1395년(태조 4) 9월에 처음 조성되었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당시의 기록에는 ‘석교(石橋)’라고 표현되었다. 세종대에 근정문 앞 석교에 ‘영제(永濟)’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그 밖에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도 함께 명명되었다(『세종실록』 8년 10월 26일).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금천이 형성되지 않았고, 태종대에 도랑을 만들어 북악의 물을 끌어들여 금천을 조성하였으며(『태종실록』 11년 7월 30일), 세종 대에도 수량이 부족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1915년에는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흥례문과 행각 등을 철거하였다. 이때 영제교를 헐어 조선총독부 박물관 근처에 부재를 모아 두었다고 한다. 1950년대에 임시로 수정전(修政殿) 앞에 설치하였으며, 1970년대에 건춘문(建春門) 안쪽에 재설치하였다.

형태

영제교는 경복궁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의 마당 중앙에 놓여 있다. 석재로 홍예부터 난간까지 전체를 만들었다. 하부에는 홍예가 2개 조성되어 있고, 상부에는 귀틀을 형성하여 교량을 설치하였다. 너비는 약 33자(약 10m), 길이는 약 43자(약 13m)이며, 교량 상판 중앙부에는 근정전을 향하는 어도가 연속적으로 설치되었다. 난간 기둥과 금천에는 서수상이 조각되었다. 난간 석주의 서수(瑞獸)는 용의 모습이고, 영제교 좌우 금천 어구 상단 서수는 세 갈래로 갈라진 뿔이 있는 모습이다. 난간의 용은 좌우로 서로 대칭을 이루었으며 똬리를 튼 모습이다. 몸통에는 전체적으로 비늘이 있고 여의주를 쥐고 있으며 큰 코와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을 벌리고 있다. 크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가로세로 375㎝ 규모이다. 금천의 일각수는 장대석 모서리를 잡은 모습이다. 머리에는 세 갈래로 나뉜 뿔이 있고 몸통에 비늘이 조각되었다. 이 서수상은 조선후기의 학자들에게 천록이나 기린으로 이해되었는데, 천록은 중국 한나라 이후 벽사의 의미로 활용되었으므로, 영제교와 금천이 갖는 경계의 역할을 장식적으로 강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경복궁에는 근정전 월대를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수의 석조 조형물이 있었다. 경복궁에 현존하는 서수상은 모두 102점으로, 광화문 7점, 영제교 8점, 근정문 3점, 근정전 56점, 경회루 20점, 자경전 1점, 집옥재 7점이다. 광화문에서 근정전에 이르는 경복궁 진입 공간에 대부분의 서수상이 위치하였고, 특별히 경회루와 집옥재(集玉齋) 등에 배치되었다. 조선전기 경복궁의 상황을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부분의 석조 조형물은 고종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경복궁 중건 정책이 왕권 강화 및 외세에의 대응과 관계된 정치적 행위였다는 점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다만, 영제교 주변의 서수상은 이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득공(柳得恭)의 「춘성유기(春城遊記)」에 묘사된 1770년(영조 46)경 영제교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양식사적으로도 고종대의 것과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영재집(泠齋集)』「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경복궁 석조조형물 학술연구 및 보존관리방안연구』, 문화재청, 2013.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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