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양문(賓陽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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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내전의 정문.

개설

빈양문(賓陽門)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뒤편에 위치한 문으로 내전(內殿) 영역으로 진입하는 정문이다. 창경궁은 1484년(성종 15)에 건립되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복구되었다. 빈양문은 창경궁을 복구할 때 지어져 액호(額號)가 정해진 문으로 추정된다.

기록상 빈양문이 등장하는 시점이 1616년이기 때문이다. 빈양문은 창경궁의 내전인 통명전(通明殿), 경춘전(景春殿), 환경전(歡慶殿) 등에서 공식적인 의례가 있을 때 왕대비전의 합문(閤門)으로 이용한 기록이 있다. 조선후기에 환경전이 빈전(殯殿)으로 빈번하게 사용되면서 발인 시 재궁(梓宮)이 명정전 월대로 나아갈 때 빈양문을 이용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일어난 이괄의 난과 1830년(순조 30)에 환경전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되기를 반복하면서 일제강점기까지 유지되다가 철거되었는데, 현재의 문은 1986년 복원한 것이다.

위치 및 용도

빈양문은 창경궁의 뒤쪽 숭문당(崇文堂)의 북쪽에 자리한 행각에 설치되었는데, 그 뒤편에 자리한 내전으로 드나드는 용도로 쓰인 정문이었다. 내전 의례 시에는 합문으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창경궁은 성종 즉위 당시 생존해 있던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덕종비 소혜왕후(昭惠王后), 예종비 안순왕후(安順王后)를 모시기 위해 창건한 궁궐로서 1484년(성종 15)에 완성되었다(『성종실록』 15년 9월 27일). 창건 시 창경궁 내전 영역에는 정전인 통명전 외에 정희왕후를 위한 수녕전(壽寧殿), 소혜왕후를 위한 경춘전, 안순왕후를 위한 환경전이 지어졌다. 그런데 이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빈양문을 포함한 위요(圍繞) 건물과 문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는 당시에 문의 액호가 빈양문이 아니었거나 해당하는 문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빈양문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경궁을 복구할 때 “빈양문 밖에 내관수문대명청(內官守門待命廳) 및 왕자 사부청(王子師傳廳)을 아울러 조성할 일을 선수도감(繕修都監)에 말하라.”는 광해군의 전교에서 처음 나온다(『광해군일기』 8년 5월 3일). 이 기사를 통해 빈양문의 건립 시기가 창경궁 복구 시점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빈양문이 내전의 정문으로 명정전 뒤쪽 월랑에 있으며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아니라는 내용은 1616년(광해군 8)에 왕세자가 책보를 받는 것에 대해 논의하던 과정과 대왕대비전의 합문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광해군일기』 8년 10월 8일)(『영조실록』 29년 12월 26일).

빈양문은 내전의 정문이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흉례(凶禮)로 인하여 망곡례(望哭禮)를 행하거나 내전에서 재궁을 발인할 때 움직이는 동선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나온다. 망곡례는 대부분 빈양문 밖에서 행하고 재궁의 발인은 빈양문을 나와 명정전을 거쳐 명정전 월대에서 하는 것으로 기록되었다(『인조실록』 23년 6월 15일)(『숙종실록』 14년 12월 15일)(『영조실록』 6년 10월 22일)(『순조실록』 5년 5월 7일).

조선후기에 창경궁에서 가장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은 1830년(순조 30)에 발생한 환경전 화재이다(『순조실록』 30년 8월 1일). 이 화재로 주변 전각과 함께 빈양문도 소실되었다. 이때 소실된 내전을 복구하는 공사가 이루어진 것은 1834년(헌종 즉위)으로 빈양문은 해당 위치에 그대로 복구되었다.

복구된 빈양문은 여전히 내전의 정문으로 일제강점기까지 유지되다가 일제의 창경원 조성과 함께 강제 철거되었다. 현재의 문은 1984년에 이루어진 발굴 결과를 통해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

형태

현재 복원된 빈양문은 좌우 월랑보다 높이 솟아 있는 솟을문의 형태이다. 전후 기둥 가운데에 문틀을 설치하여 문짝을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은 월랑과 어울리도록 맞배로 구성하고 기와를 얹었다. 빈양문은 내전의 정문으로 의례 시에만 개폐하였으며 평상시에는 좌우월랑에 설치한 협문을 사용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정조는 창경궁의 환경전과 영춘헌(迎春軒) 등에 자주 머물렀는데, 이때 대신들이 입시할 경우 빈양문과 집현문(集賢門)을 모두 합문으로 사용하였다. 창경궁의 승정원은 합문과 멀고, 또 합문은 편전(便殿)과 조금 떨어져 있는 데다 그 사이에 전랑(殿廊)을 거치고 층계를 밟아야 하는 등 공간이 복잡하여 입시하는 신하들이 늘 달려오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정조실록』 20년 5월 25일).

순조 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자 순조는 내각(內閣)과 승정원을 빈양문 근처로 옮기도록 하는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순조실록』 15년 12월 14일)(『순조실록』 21년 3월 4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내각일력(內閣日曆)』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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