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경당(集慶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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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의 회상전 서남쪽에 위치한 침전 건물.

개설

1620년(광해군 12)에 경희궁이 완공되었을 때, 왕의 침전으로 회상전(會祥殿)과 융복전(隆福殿)이 건립되었다. 회상전과 마당을 공유하는 동향의 건물로 예연당(蘂淵堂)이 있었는데, 이것을 1699년(숙종 25)에 왕이 집경당(集慶堂)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위치 및 용도

집경당은 회상전의 서행각 위치에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남향으로 자리 잡은 회상전의 서남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하나의 마당을 사용하였다. 집경당 뒤편으로는 높은 지형 위에 자정전이 있으며, 자정전(資政殿)으로 향하는 행각이 이어졌다. 숙종과 영조가 승하하여 자정전에 마련한 빈전으로 재궁을 옮길 때 집경당을 통하여 뒤 행각으로 올라 자정전에 이르렀다.

1661년(현종 2)에는 세자가 태어나 집경당에서 거처하였으며, 1699년에 세자가 천연두를 앓았을 때도 이곳에서 머물렀다. 영조는 경서를 강론하거나 신하를 인견하는 곳으로 집경당을 자주 활용하였으며, 도목정사(都目政事)를 행하여 편전과 같은 용도로도 사용하였다.

변천 및 현황

1620년에 광해군이 경희궁을 완공하였을 때 예연당이라는 이름으로 회상전 앞마당에 동향으로 건립하였다. 1693년(숙종 19)에 승휘전(承輝殿) 담장 공사와 함께 경희궁 전각들을 소소히 수리하는 공사를 행했는데, 이때 예연당의 4면에 퇴를 수리하고 단청을 새롭게 칠하였다. 이후 1699년에 당호를 집경당으로 바꾸었다.

1829년(순조 29) 10월에 회상전에서 화재가 일어나 집경당을 비롯하여 융복전과 흥정당(興政堂), 정시합(正始閤), 사현합(思賢閤) 등이 소실되었다(『순조실록』 29년 10월 3일). 1831년(순조 31)에 서궐영건도감(西闕營建都監)을 세우고 소실된 모든 전각을 중건하였으며, 이때 집경당도 새롭게 중건하였다.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난 뒤에 경희궁은 궁궐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건물이 철거되기도 하고, 1868년(고종 5)에는 경희궁의 공허지가 경작지로 분배되었다. 그러나 집경당에서 1892년(고종 29)에 고종이 일본 공사 미산정개(梶山鼎介), 미국 공사 알렌([安連], Allen, Horace newton], 영국 공사 카아, 프랑스 공사 개랭(桂冷), 독일 공사 랜스돌푸, 러시아공사 드매트레프스키([德密特], Dmitrevsky), 영국 영사, 독일 영사를 접견한 기록으로 보아 19세기 말까지는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종실록』 29년 7월 25일). 1910년(융희 4)에 경희궁지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설 무렵에는 집경당은 사라지고 없었다.

형태

1831년에 중건된 집경당은 높은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기둥 상부에는 익공을 짜 올렸으며, 팔작지붕에 용마루와 내림마루 등에는 양상도회하고 잡상을 올려 격식을 갖추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99년(숙종 25)에 천연두를 앓던 세자가 예연당에서 회복한 경사가 있었다. 숙종은 이 기쁨을 기념하기 위해 예연당에 집경당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날의 기쁨을 오래 남기고자 하였다. 세자의 건강이 회복한 곳이며, 자신이 태어나 3일 만에 예연당으로 거처를 옮겨 자랐고, 1671년(현종 12)에 혼인했을 때에도 예연당에 머물렀으니 ‘기쁜 날들이 이곳에 모인다.’는 의미에서 ‘집경(集慶)’이라 하였다. 숙종은 이렇게 이름 짓고 이러한 내용을 좌의정(左議政) 최석정(崔錫鼎)에게 「집경당기(集慶堂記)」로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숙종실록』 25년 5월 10일).

참고문헌

  •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
  •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
  • 은정태, 「고종시대의 경희궁-훼철과 활용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34, 2009.
      1. 그림1_00018006_ 『서궐영건도감의궤』 도설, 집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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