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석진(靑石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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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개성부에 속한 첨절제사진.

개설

청석진은 현재의 황해북도 장풍군에 있는 진보(鎭堡)이다. 이곳은 숙종 초에 도성 주변의 방어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꾸준히 발전하였다. 순조대에 성을 축조하고, 병마첨사(兵馬僉使)가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혁파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입지적 조건을 가졌기 때문에 고종 초반에 복구되었다.

위치 및 용도

현재 황해북도 장풍군 석촌리 일대에 있다. 청석동은 깊은 계곡으로 평산(平山), 금천(金川)에서 개성을 거쳐 한양으로 들어가는 의주대로(義州大路)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한, 도로가 협소하여 방어하는 측에 매우 유리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후기 개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하였다.

변천 및 현황

청석은 원래 개성 일대 방어에 중요한 곳이었다. 특히, 1624년(인조 2) 1월에 ‘이괄의 난’을 겪으며 개성 방어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그 과정에서 청석동을 중심으로 한 개성 일대의 방어 체계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인조실록』 9년 7월 4일). 하지만 병자호란 이후 청의 감시로 조선은 성지(城池)를 새로 수리하거나 신축하지 못하여 개성 일대의 방어 체계를 마련하려는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숙종의 즉위 시점에 청에서 ‘삼번(三藩)의 난’이 일어나자 도성 주변의 방어 체계 전반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대흥산성(大興山城) 등을 축성하며 개성 지역에 대한 방어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지리적 특수성 등을 고려하여 점차 의주대로에서 벗어난 대흥산성보다 도로에서 가까운 청석동 지역으로 군사적 중심도 점차 이동하였다. 즉, 1710년(숙종 36) 10월과 11월에 이광정과 김우항이 요충지인 청석동의 군사 지휘권을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방어하도록 하여 대흥산성과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게 하자고 건의한 것이다(『숙종실록』 36년 10월 3일) (『숙종실록』 36년 11월 29일).

영조대에 이르면 청석동의 방어 강화를 위해 1730년(영조 6) 10월에 여현진(礪峴鎭)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또한, 1742년(영조 18) 11월에 여현진과 청석동 일대에 대한 추가 축성과 개경 주변의 배천, 금천, 장단, 적성을 개경과 함께 5영(營)의 제도에 준하여 이 지역 방어체계를 정비하기도 하였다.

1803년 12월에 이르면 청석동 산기슭을 따라 3리 규모의 성을 쌓아 청석진을 설치하고, 진장(鎭將)을 두기로 하였다(『순조실록』 3년 12월 8일). 결국, 이듬해 8월에 첨사(僉使)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순조실록』 4년 8월 10일). 그렇지만 과도한 방어 체계를 유지하는 것은 개성부의 재정적 어려움을 가중시켜, 1822년 3월에 혁파되어 백치첨사(白峙僉使)가 대신하게 하였다(『순조실록』 22년 3월 20일). 그러나 이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1866년 11월에 다시 청석진을 복구하기로 하였다(『고종실록』 3년 11월 27일).

관련사건 및 일화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일본군에게 밀려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하였다. 이후 이여송(李如松)의 지휘로 평양성을 탈환하였고,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장세작(張世爵)을 선봉으로 보냈다. 그는 청석곡(靑石谷)에서 왜적 수백 명을 만나 공격하여 30급을 베었다. 이 때문에 개성에 있던 적이 한양으로 도망쳤다(『선조실록』 26년 1월 1일).

또한 1624년(인조 2) 1월에 ‘이괄의 난’이 발발했을 때,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이서 등에게 개경의 청석동에서 차단하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인조실록』 2년 2월 8일). 이 때문에 이서 등은 벌을 받았다(『인조실록』 2년 2월 23일).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해서읍지(海西邑誌)』
  • 『대동지지(大東地志)』
  • 『동여도(東輿圖)』
  •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북한편)』2,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2013.
  • 노영구, 「조선후기 開城府 일대 關防體制의 정비와 財政의 추이」, 『한국문화』3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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