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비(定界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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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국이 양국 간의 경계를 조사한 내용을 비석에 새겨 백두산 천지의 남면에 세운 석비.

개설

1712년(숙종 38) 5월 접반사(接伴使)박권(朴權)과 오라총관(烏喇摠管)목극등이 조선과 청국의 국경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회담을 열면서 백두산 지역을 답사한 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워서 양국의 강역(疆域)을 조정하였다(『숙종실록』 38년 3월 4일). 조선 측은 만주 지역의 지도와 지리지, 함경도 지방관들이 수집한 자료들을 근거로 해서 압록강과 두만강·백두산을 경계로 그 남쪽을 조선의 영역으로 주장하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 측에서는 청국에서 발간한 『성경지(盛京誌)』에 “백두산 남쪽은 조선의 지리적 경계이다.”라고 한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로 만주 지역의 지리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발간한 지리서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백두산을 여진(女眞)에 속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이남까지 영토로 주장할 우려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조선과 청국의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조선 측의 우려와는 달리 목극등은 양국의 국경을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경계로 보았다. 목극등은 양국을 경계하는 ‘분수령(分水嶺)’을 정한 뒤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정하였다. 이때 백두산정계비에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에 이르며’라고 하여 동서 경계를 압록강과 두만강[토문강]을 기준으로 하였다.

위치 및 용도

백두산 천지에서 동남쪽 산기슭 1리 남짓의 압록강과 토문강 사이, 동남쪽으로 경사진 평탄한 안부(鞍部)에 세워졌다. 비면은 남쪽을 향해 서쪽에서 북쪽으로 30도의 방향을 이루고 있다. 정계비가 세워진 지점에서 토문강 하류 수리 사이에 높이 5~6척의 석퇴(石堆) 및 토퇴(土堆)가 있다. 점점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또한 비석에서 약 1리 반 지점으로부터 양안(兩岸)이 서로 좁아져, 대각봉(大角峯) 부근에서 양안의 단애는 높이 약 100m가 되어 그 형상이 마치 문과 같다. 이로 인하여 비로소 조선과 청국 사이의 경계가 설정되었다.

변천 및 현황

조선과 청국의 경계를 확정하기 위하여 세워졌으며, 19세기 말 간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로 이용되었다. 1909년 일본과 청국 간의 간도협약에 따라 간도의 영유권이 청국에 귀속되면서 정계비를 둘러싼 한청 양국의 국경 분쟁은 소멸되었다(『순종실록』 2년 9월 4일). 1931년 만주사변 전후 정계비가 사라져 오늘날까지 행방불명이다.

형태

20세기 초 백두산을 답사한 이광수에 의하면, 정계비는 해발 2,150m 지대에 있고, 청색의 자연석이며 높이는 2척 3촌(약 70㎝), 넓이는 1척 8촌(약 55㎝)이었다. 비석의 밑에는 자연석을 괴었고 뒤에도 자연석을 버티어 놓아두었다고 한다.

통감부파출소의 조사에 의하면, 정계비는 높이 약 2척 남짓, 폭 1척 남짓으로, 비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자가 조각되었다.

烏喇摠官穆克登奉旨査邊至此審視西爲鴨綠(오라총관목극등봉지사변지차심시서위압록)

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동위토문고어분수령상륵석위기)

大淸 康凞五十一 年五月十五日(대청 강희오십일 연오월십오일)

筆帖式蘇爾昌(필첩식소이창)

通官二哥(통관이가)

淸 朝鮮軍官李義復趙台相(청 조선군관리의부조태상)

差使官許樑朴道常(차사관허량박도상)

通官金應瀗金慶門(통관금응헌금경문)

위의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오라총관목극등이 지(旨)를 봉(奉)하여 변경을 조사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조사해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이다. 따라서 분수령 위에서 칙석(勒石)에 기록한다.

대청(大淸) 강희 51년 5월 15일

필첩식(筆帖式) 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 이가(二哥)

조선군관(朝鮮軍官) 이선복(李義復)조태상(趙台相)

차사관(差使官)허량(許樑)박도상(朴道常)

통관(通官) 김응헌(金應瀗)김경문(金慶門)

관련사건 및 일화

19세기 말 조선과 청이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을 조정하며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때, 조선 측이 주요 논거로 사용한 것이 정계비의 내용이다. 1909년 9월 4일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 제1조에는 도문강을 한국과 청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 원천지에 있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를 두 나라의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統監府臨時間島派出所紀要)』
  • 시노다 지사쿠, 신영길역, 『간도는 조선땅이다-백두산정계비와 국경』, 지선당, 2005.
  • 이왕무·양승률·서동일·정욱재, 『역주 감계사등록』 1, 동북아역사재단, 2008.
  • 이왕무·양승률·서동일·정욱재, 『역주 감계사등록』 2, 동북아역사재단,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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