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성(靈巖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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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도영암군에 축성한 방어시설인 읍성.

개설

영암성은 전라도영암군(靈巖郡)에 있던 영암읍성(靈巖邑城)을 말한다. 영암군은 전라도 남쪽 서해안에 위치한 군현이다. 동쪽으로는 장흥군(長興郡), 북쪽으로는 나주군(羅州郡), 남쪽으로는 해남군(海南郡)·강진군(康津郡)과 접해 있다. 전라도의 세곡이 집결하는 영산강과 경상도와 전라도의 세곡을 서울까지 조운하는 바닷길에 위치하였다. 이로 인해 영암군은 세곡 운송을 보호하고 교통로를 확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영암군은 서해안에 위치하여 왜구들의 침입에 취약했기 때문에 읍성을 쌓아 백성들과 곡식을 보호하였다. 영암성은 조선시대 영암군의 방어체제를 담당하던 읍성이었다.

위치 및 용도

전라도영암군 읍치에 위치하였다. 영암성의 역할은 지방 군현의 백성을 보호하고, 군사·행정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읍성 안에는 백성들의 주거 공간과 군현 행정을 위한 관청 등이 설치되어 평시에는 행정 기능을 수행했으며, 전쟁이 일어나거나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에는 방어시설로 변모하였다. 영암성과 같은 읍성은 조선시대 해안과 인접한 지방 군현에서 자주 보이는 방어체제이다.

변천 및 현황

자세한 기록은 1451년(문종 1) 처음 확인된다. 충청·전라·경상도도체찰사정분(鄭苯)이 전라도 각 고을의 성자(城子)를 순행하고 보고한 내용에는 영암군 읍성은 주위가 4,369척(약 1,324m), 성의 높이가 평지는 12척(약 3.6m), 높고 험한 지대는 9척(약 2.7m), 여장(女墻)의 높이는 3척(약 0.9m)이며, 적대(敵臺)가 6개소, 문이 3개소인데 옹성(擁城)이 없으며, 여장이 639개, 성안에 샘이 2개소이고, 해자(海子)는 아직 파지 않았다고 하였다(『문종실록』 1년 8월 21일). 영암성은 이미 조선초기부터 공격과 방어시설을 갖춘 읍성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읍성을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369척, 높이가 15척(약 4.5m)이며, 성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고 되어 있다. 18세기 『여지도서』에서는 영암읍성이 석성으로 둘레 4,369척, 높이 15척으로 기록되어 규모는 동일하지만, 여장의 수만 1,025개로 386개가 대폭 늘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형태

돌로 쌓은 석성으로서 둘레는 4,369척, 높이는 15척이었다. 우물이 4개, 여장이 1,025개 설치된 읍성의 형태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55년(명종 10) 5월 전라도 강진군을 통해 왜구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한 이른바 ‘을묘왜변’이 발생하였다. ‘을묘왜변’은 계속된 흉년으로 고통받던 조선 백성에게는 이중의 고통이었다. 5월 18일 병영을 이미 장악한 왜구는 25일 새벽에는 영암성 아래에 모여 있었다. 남치근(南致勤)과 조안국(趙安國)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왜구가 영암에서 전투를 벌여 26일에 비로소 승전하였다. 영암에서 패한 왜구는 바다로 나가 배를 타고 도주하였다(『명종실록』 10년 8월 15일).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