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산성(鳥嶺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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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조령에 축조한 성.

개설

경상도와 충청도의 접경 지역에 있는 천험의 요새인 조령(鳥嶺)에 축조한 성이다. 조령은 영남에서 그를 넘어 충주를 거치면 바로 서울이기 때문에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었고, 때문에 산성을 축조한 것이다. 1653년(효종 4)에 별장(別將)을 없애고 현감으로 하여금 전관(專管)하도록 했다. 1711년(숙종 37)에 다시 별장을 설치했다(『숙종실록』 37년 2월 2일).

위치 및 용도

조령은 죽령(竹嶺)·황간(黃澗)과 함께 영남에서 서울로 오는 길이다. 조령과 충청도의 추풍령(秋風嶺)의 사이에 충주가 있다. 조령산성은 군사적 요충지로 국가의 승패에 관계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곳의 수비에 실패하였고 이듬해에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조령을 지키면 서울이 편안해질 수 있다 하여 관문(關門)을 설치했다. 조령을 굳게 지키면 충주가 안전하고 충주는 경도(京都)의 상류에 있으므로 충주를 보전하면 서울이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변천 및 현황

1653년(효종 4)에는 별장을 파하고 현감으로 하여금 전관하도록 했다. 1711년 2월 조령산성에 주관하는 별장을 다시 설치하고 관할 현의 현감이 그 칭호를 승격하여 이를 관할하게 했다. 1718년(숙종 44) 12월에는 조령산성을 증축했다(『숙종실록』 44년 12월 10일).

문경 북쪽 조령 남쪽에 고려 때 왕을 태운 가마인 어가가 머물렀다 하여 어류(御留)라는 명칭의 산성이 있었는데, 그 규모가 남한산성보다 더 컸다고 했다(『인조실록』 16년 3월 5일).

형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남북이 8리, 둘레가 18,509보(步)에 이른다. 성이 세 곳에 있는데, 하나는 충청·경상 두 도의 경계가 되는 고개 위에 있고 조령관(鳥嶺關)이라 한다. 하나는 근처의 응암(鷹巖)에 있고, 북쪽 충원(忠元)의 옛 성으로 인해서 조동문(鳥東門)을 고쳐 쌓았다. 하나는 초곡(草谷)에 있고 주흘관(主屹關)이라 한다. 문경·함창(咸昌)·예천(醴泉)·용궁(龍宮)·상주 5읍의 군량창(軍餉倉)이 있다. 위의 세 곳은 모두 문 위쪽이 반원형이 되게 만든 홍예문(虹霓門)이 있으며, 큰길을 통해서 또 홍예문 세 칸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92년 4월 17일 임진왜란 당시 신립(申砬)이 충주에 이르렀을 때 모든 장수들이 조령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막자고 하였으나 신립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 27일 충주의 단월역(丹月驛) 앞에 진을 쳤는데 군졸 가운데 ‘적이 벌써 충주로 들어왔다.’고 하는 자가 있자, 신립은 군사들이 놀랄까 염려하여 즉시 그 군졸을 목 베어서 엄한 군령을 보였다. 적이 복병을 설치하여 아군의 후방을 포위하였으므로 아군이 드디어 대패하였다. 신립은 포위를 뚫고 달천(㺚川)의 월탄(月灘)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 죽었다. 그의 종사관김여물(金汝岉)과 박안민(朴安民)도 함께 빠져 죽었다(『선조실록』 25년 4월 17일).

1613년(광해군 5)에는 조령 길목에서 도적이 행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도적떼의 우두머리 서얼 박응서(朴應犀)는 도망갔고 도적 허홍인(許弘仁)의 노비 덕남(德男) 등을 체포했는데, 형벌을 가하기도 전에 낱낱이 자복했다(『광해군일기』 5년 4월 25일). 이것이 계축옥사의 발단이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