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문(思政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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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편전인 사정전과 정전인 근정전 사이에 있는 문.

개설

경복궁의 중심 공간은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편전인 사정전(思政殿),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을 위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사정전은 왕이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시사전으로 이용되었다. 사정문은 사정전 앞의 행각, 즉 근정전 북쪽 행각의 중앙에서 근정전과 사정전을 연결하는 문이다.

위치 및 용도

사정문은 경복궁의 사정전 영역과 근정전 영역을 구분 짓는 문으로 사정전 남행각의 중앙에 있다. 사정전에서 상참(常參) 등의 의례를 행할 때 사정문을 경계로 문외위(門外位)가 구성되었으며, 상참·경연·조계 등은 사정전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사정문은 왕이 조하(朝賀), 조참(朝參) 등을 위해 사정전을 나서 행례위로 이동하고자 할 때 합문(閤門)으로 활용되었으며, 왕의 공식적인 행위가 출발하는 장소가 되었다. 합문은 특정 문에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왕실 주요 인물의 내외, 공사의 경계라는 개념을 갖는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사정문은 궁궐의 가장 중요한 경계 요소로서 합문의 위치를 점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사정문은 경복궁 창건 때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의 기록에는 명확하게 문의 존재가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사정전에서 남쪽으로 뻗은 복도각과 근정전의 북쪽 행각이 교차하는 지점을 사정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에는 근정전과 사정전 사이에 2중의 행각이 동서로 놓였고, 사정전 정면에서 근정전 후면으로 복도각이 연결되었다. 이후 1429년(세종 11)에 상참의식을 정비하면서 공간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사정전을 개영하였고, 사정문을 포함한 이 일곽이 재구성되었다(『세종실록』 11년 1월 9일)(『세종실록』 11년 4월 3일).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사라졌다가 고종대에 중건하면서 복구되었다. 이 일곽은 일제강점기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등으로 변형되었다가 1990년대의 정비를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에는 사정문과 연결된 행각이 2칸의 복랑으로 묘사되었고, 「북궐도형」에는 1칸의 단랑으로 묘사되어 서로 차이가 있다. 또한 1903년(광무 7)의 수리 기록에서 사정문 4칸 반이라 기록되어 퇴칸을 포함하여 정면 3칸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목구조이며, 지붕은 홑처마 맞배로 좌우의 행각의 지붕보다 높이 조성되었다. 어칸 3,690㎜, 좌우 협칸 각 2,765㎜이며, 측면은 2칸이 각 2,380㎜이다. 장대석 외벌대 기단이고, 원형 조좌에 측면에 반원형 쇠시리를 둔 사각형 초석이다. 민흘림이 있는 원기둥이며, 1고주 5량가의 구조 형식이다. 좌우의 행각에는 내탕고 등이 있으며 사정전을 향하여 북쪽으로 문을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경복궁사정전일곽 정밀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4.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 경세진·조재모, 「閤門을 통해 본 朝鮮時代 宮闕의 內外槪念」,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25권 12호, 2009.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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