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화궁(順和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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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헌종의 후궁인 경빈김씨의 궁호(宮號) 혹은 그 궁가(宮家)를 가리키는 말.

개설

경빈김씨(慶嬪金氏)는 주부(主簿)김재청(金在淸)의 딸로, 1832년(순조 32)에 태어났다. 1847년(헌종 13)에 순원대비(純元大妃)가 헌종이 나이가 많은데도 후사가 없어 정식으로 간택해서 들임에 따라 후궁이 되었고, 그해 경빈으로 책봉되었다. 순화궁은 후궁 책봉 시 경빈김씨에게 내려진 궁호인데, 더불어 경빈김씨에게 속한 궁방전(宮房田) 및 재산을 관리하고 사후에 제사를 맡아 지내던 궁가의 명칭이기도 하다.

1849년(헌종 15)에 헌종이 승하한 뒤 경빈김씨는 궁궐 밖 궁가로 나가, 1907년(융희 1) 6월 1일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때 순화궁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경빈 사후, 1908년(융희 2) 그 가옥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사위였던 이윤용(李允用)을 통해 이완용(李完用)에게 넘어감에 따라 순화궁은 서소문 안에 있던 엄준원(嚴俊源)의 집으로 옮겨졌다. 서부 반송방(盤松坊)엄준원의 집에 있던 순화궁은 1911년에 그 가옥과 토지를 남작(男爵) 장석주(張錫周)에게 내주고, 북부 관광방(觀光坊)간동(諫洞)에 있는 전 호위대 영사(營舍)로 이전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 옮긴 곳은 간동이 아니라 제동인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및 현황

조선후기에는 왕자를 낳지 못한 후궁들도 왕의 사후에 궁가에 나가 살 수 있도록 하였다. 또 궁가는 후궁들이 죽은 뒤에는 그 제사를 담당했는데, 순화궁도 조선후기 궁가의 일반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경빈김씨는 궁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헌종이 승하하자, 다시 궁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녀가 나와서 살기 시작한 곳은 조선전기부터 종로에 있어 왔던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집이었다. 이곳은 집터도 넓고 태화정(太華亭)이라는 정자도 있어서 도성에서도 운치 있기로 소문난 곳이었다(『영조실록』 49년 2월 15일). 경빈김씨는 이곳에서 1907년 6월 1일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살았다.

경빈이 죽은 뒤에는 궁속들이 남아 제사를 받들고 있었는데, 1908년 궁내부(宮內府) 대신이었던 이윤용이 칙령으로 그 집을 하사받게 되면서 순화궁은 서소문 안에 있던 엄준원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470여 칸이나 되는 넓은 궁가에 살던 궁속들은 옮긴 곳이 좁다고 불평하였고, 이 사정은 신문에까지 실렸다. 1911년에는 다시 장석주에게 서부 반송방의 토지와 가옥을 내어주고 북부 관광방간동에 있는 전 호위대 영사로 이전하라는 칙령이 있었지만, 결국 제동으로 옮겼다.

맨 처음 순화궁 역할을 한 가옥은 이윤용과 이완용에 의해 1915년에 명월관(明月館)에 임대되었고, 그에 따라 이곳에 명월관의 분점 격인 태화관(太和館)이 들어왔다. 그 뒤 이곳은 조선 지식인들이 교유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이후 3·1 독립 선언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921년에는 태화기독교사회관이 들어와 사회 활동을 하였다.

형태

순화궁은 두 번이나 장소를 옮겼지만 해당 가옥의 도면이 모두 남아 있어 그 형태를 알 수 있다. 경빈이 살았던 순화궁의 도면은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이문내구윤옥가도형(里門內具允鈺家圖形)」이라는 명칭으로 남아 있고, 서소문 안에 있을 때와 제동에 있을 당시의 도면은 각각 「순화궁도형(順和宮圖形)」과 「재동순화궁도형」이라는 이름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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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영조어제표태화정게판첩(英祖御製表太華亭揭板帖)』
  • 『황성신문(皇城新聞)』 1908년 3월 21일.
  • 정정남, 「인사동 194번지의 都市的 變化와 18세기 漢城府 具允鈺 家屋에 관한 연구-장서각소장 『里門內具允鈺家圖形』의 분석을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제17,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