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성산성(禿城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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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의 독산(禿山)에 위치한 산성.

개설

독성산성은 테뫼식의 석축 산성으로 백제 때 처음 축성하였다. 이 지역은 남쪽에서 한성으로 들어오는 진입로로서 군사적 요충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관찰사권율이 주둔하면서 일본군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최초 개축된 이래 여러 차례 개축이 이루어졌다.

위치 및 용도

독성산성은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산 155번지 일대 독산의 7~8부 능선에 위치한다. 능선을 따라 둘러싼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백제 때 축성한 이래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당시에는 주요 격전지의 하나였다. 이 산성은 넓은 들판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주위에 험준한 지형지물이 없이 오직 이 산만 우뚝 치솟았는데, 나무가 없어서 마치 빤질빤질한 대머리 형상으로 보였다. 이에 독성(禿城)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지역은 남쪽에서 한성으로 들어오는 진입로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이었다. 따라서 임진왜란 중 유성룡이 한강 이남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곳으로 선정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 정유재란 초기 일본군이 북상하자 별장조발(趙撥)을 이 성에 파견하여 북상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변천 및 현황

백제 때 최초 축성한 이래 임진왜란 이전에 이 성은 이용되지 못하고 허물어진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권율(權慄)의 군사가 이곳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물리친 이후 그 전략적 유용성이 확인되자 1594년(선조 27) 경기도관찰사유근(柳根)이 이 산성을 크게 수축하였고 이듬해에는 포루(砲樓)를 갖추었다[『선조실록』27년 9월 19일 3번째기사]. 1597년에는 석차와 포차를 배치하고 성 밖에 목책 설치를 고려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독성산성의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1610년(광해군 2) 방어사변응성(邊應星)이 수축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독성산성의 방어체제 정비가 이루어져 1682년(숙종 8)에는 총융청의 중군(中軍)이 이 성의 방어책임자를 겸하는 대신 별장(別將)을 임명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8년 5월 9일 2번째기사]. 1792년(정조 16)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는데, 성의 둘레는 1,004보로, 신축 부분이 732보, 수축 부분이 272보였다. 수문은 3곳을 개축하고 여장도 309보를 신축하였다. 남장대(南將臺)는 이전 터에서 3척을 옮겨서 다시 세웠다[『정조실록』16년 10월 3일 1번째기사]. 1804년(순조 4)에는 성 남쪽에 암문(暗門)을 신축하였다.

형태

이 성의 성벽 둘레는 1,004m 정도이고 높이는 5~11m이다. 1982년 복원된 성벽은 길이 1,095m이고 높이는 1m 내외이다. 성벽에는 치성(雉城) 8개소와 문지 5개소가 복원되었으며 일부에는 여장을 축조하였다. 성벽의 기단은 할석을 불규칙하게 안쪽으로 쌓아 올렸고 외벽은 장방형 혹은 정방형의 돌로 마감하였다. 내벽에서는 일부 성토(盛土)한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92년 7월 이치(梨峙)에서 승리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을 저지한 권율은 그 공으로 광주목사에서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다. 권율은 곧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선조를 구원하기 위해 전라도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병(勤王兵)으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충청도 아산을 거쳐 12월에는 독성산성으로 들어가 진영을 설치하였다. 한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권율의 부대가 독성산성에 주둔한 것을 알고 후방과의 보급 및 연락 단절을 우려하여 독성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권율은 성을 지키고 간혹 날쌘 군사들을 출동시켜 기습하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독성산성은 샘이 없어 물이 부족하였는데 이를 알아차린 일본군은 성으로 들어가는 냇물을 차단하여 성안의 조선군은 곤경에 처하였다. 이때 권율은 군마 몇 마리를 일본군이 잘 보이는 서장대에 데려가 흰쌀로 뿌려 마치 맑은 물로 씻는 듯한 심리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독성산성이 고립되자 조정에서는 주변의 조선군을 독성산성 일대로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이에 곤경에 처한 일본군은 군사를 거두어 한성으로 들어갔고 이때부터 의주에서 호남에 이르는 서로(西路)가 통하였다. 이 길을 이용하여 여러 지역의 군사와 의병들이 경기 지역으로 진출해 주둔하면서 일본군을 압박하였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서애집(西厓集)』
  • 유재춘, 「조선성곽」, 『경기도의 성곽』, 경기문화재단,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