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보(鎭東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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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갑산군에 설치한 군사시설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여러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진동보가 소속돼 있는 갑산군(甲山郡)은 본래 허천부(虛川府)였는데, 조선초기에는 호인(胡人)들에게 점거되어 여러 차례 병화를 겪으면서 거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려시대에 갑산만호부였던 것이 조선에 와서 1413년(태종 13)에 갑산군으로 고쳐졌다. 진동보(鎭東堡)는 갑산군에서 북동쪽으로 무산군(茂山郡)과 명천군(明川郡)으로 가는 도로변에 설치되어 내지로 침입한 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갑산군의 북동쪽으로 12리(약 4.7㎞)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재 진동보는 갑산군 중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초기에는 본진과 많이 동떨어져 거주하는 백성이 20호밖에 되지 않아 방어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반해 가을마리(加乙麻里)는 중앙에 있고 또 거주하는 백성이 많은데 보를 설치하지 않아서 적군이 혹 들어와 도둑질하면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함경도도체찰사가 진동보를 가을마리로 옮길 것을 제안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동하였다(『세조실록』 6년 11월 19일).

진동보는 무산군과 명천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유사시 적군이 압록강을 건너 내지로 진입할 경우 도로를 차단하고 적군을 막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1475년(성종 6) 성종이 함경도감사와 절도사를 지낸 자들을 불러 갑산(甲山)을 혜산(惠山)으로 옮기는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갑산이 적군이 내려오는 주로 도로라는 이유로 무산되었다. 이때 갑산의 두 갈래 도로를 방어하는 진보가 바로 진동보와 동인보(同仁堡)였다. 갑산을 옮길 경우 두 진보의 방어체제가 약화될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성종실록』 6년 12월 12일).

변천 및 현황

조선초기부터 운영되었다. 진동보는 1490년(성종 21) 둘레 1,400척(약 424m), 높이 8척(약 2.4m) 규모의 석성(石城)을 완성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둘레가 1,495척(약 453m)이라 기록하고 있다. 1512년(중종 7) 권관을 파견하였다. 진동보는 이후 연대기 사료에서는 자주 보이지 않지만, 조선후기까지도 군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만호를 두어 통솔하게 하고 남병영(南兵營) 우영(右營)에 편제되었다.

형태

둘레 1,495척, 높이 5척(약 1.5m) 규모의 석성이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