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전(會祥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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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회상전 |
한글표제 | 회상전 |
한자표제 | 會祥殿 |
상위어 | 경희궁(慶熙宮) |
관련어 | 융복전(隆福殿)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신지혜 |
장소 | 경희궁 |
규모(정면/측면/칸수) | 정면 7칸/측면 4칸/총 18칸 |
양식 | 익공 |
관련 인물 | 인선왕후(仁宣王后), 인경왕후(仁敬王后), 숙종, 순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회상전(會祥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7년 2월 20일, 『순조실록』 34년 11월 13일, 『순조실록』 29년 10월 3일 |
경희궁에서 왕 또는 왕후가 생활하는 침전.
개설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에 영건을 시작하여 1620년(광해군 12)에 완공하였다. 외전으로는 숭정전(崇政殿)을 정전으로 하고 자정전(資政殿)을 편전으로 건립하였으며, 내전의 정전으로는 회상전(會祥殿)과 융복전(隆福殿)을 건립하여 왕과 왕후의 생활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전기에 건립된 경복궁에는 내전의 정전으로 강녕전(康寧殿)을 사용하고, 창덕궁에서는 대조전(大造殿)을 사용했다.
이와 달리 조선후기에 건립된 경희궁은 내전의 정전을 융복전과 회상전 두 곳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전을 분리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궐도안(西闕圖案)」에 묘사된 건물의 형태로 보아 회상전은 전면에 누마루를 두어 왕의 침전으로 보이며, 융복전에는 넓은 월대를 두어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 수 있도록 하였다.
위치 및 용도
『궁궐지(宮闕志)』의 기록에 의하면, 회상전이 숭정전의 동북쪽에 있다. 회상전은 융복전과 나란히 남향으로 자리 잡고, 행각으로 각 영역이 분리되었다. 회상전의 앞마당에는 집경당(集慶堂)이 동향으로 자리하였다. 회상전은 주로 왕이 생활하는 침전이나, 편의에 따라 왕후가 사용한 사례도 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는 회상전에서 숙종을 낳았다. 1681년(숙종 7)에 숙종 비 인경왕후(仁敬王后)는 천연두에 걸려 경희궁으로 옮겨 와 회상전에서 머물다 세상을 떠났다(『숙종실록』 7년 2월 20일). 그리고 1834년(순조 34)에는 순조가 회상전에서 머물다 승하하였다(『순조실록』 34년 11월 13일).
변천 및 현황
회상전은 1620년(광해군 12)에 광해군에 의해 경희궁의 침전 건물로 건립되었다. 1693년(숙종 19)에 약간의 수리를 한 후 별다른 변화 없이 침전으로 활용하였다.
1829년(순조 29) 10월에 회상전에서 화재가 일어나 융복전과 집경당, 흥정당(興政堂), 정시합(正始閤), 사현합(思賢閤) 등을 모두 태웠다(『순조실록』 29년 10월 3일). 화재 직후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1831년(순조 31) 2월 19일에 상량하였으며, 4월에 공사를 마쳤다. 하지만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난 뒤, 경희궁은 궁궐로 활용되지 못하였으며, 1868년(고종 5)에 경희궁의 공허지를 경작지로 분배하였다. 이 무렵 경희궁의 전각들이 대거 철거되었으나, 회상전은 흥정당·숭정전·흥화문(興化門)·황학정(黃鶴亭) 등과 함께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10년(융희 4)에 경희궁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중학교 부설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로 사용되었다. 1928년에 조계사에 매각되어 주지 집무실로 사용되었으나, 1936년에 조계사에 일어난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형태
회상전은 「서궐도안」과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도설(圖說)」에 묘사되었으나 두 자료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의 규모로 보아 『서궐영건도감의궤』의 도설과 같이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3칸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갖추고 온돌방 주변으로 퇴를 둘러 형성한 침전 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를 두지 않고 무량각으로 형성하였다. 추녀마루에는 잡상이 놓였으며, 기둥 위에는 익공을 구성하고 기둥 사이에 화반을 두어 장식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74년(숙종 즉위)에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회상전에서 머물다 승하하였으며, 1680년(숙종 6)에 숙종 비 인경왕후도 천연두로 인하여 창덕궁을 떠나 경희궁의 회상전에서 머물다 승하하였다. 회상전에서 승하한 인선왕후와 인경왕후는 대렴까지 회상전에서 마친 후, 동쪽에 있는 융복전에 빈전을 마련하여 5개월 동안 빈전의례를 마치고 산릉으로 발인하였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서궐도안(西闕圖案)」
- 박성진·우동선, 「일제강점기 경희궁 전각의 훼철과 변화」,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논문집』, 제26권 1호, 2006.
- 신지혜, 「조선 숙종대 왕실 상장례 설행공간의 건축특성-빈전, 산릉, 혼전을 대상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홍석주, 「조선조 광해군 대의 궁궐건축에 관한 연구-인경궁과 경덕궁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그림1_00018009_『서궐영건도감의궤』「도설」
- 그림2_00018009_『서궐영건도감의궤』「서궐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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