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西小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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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성곽의 서남쪽에 설치한 소문.

개설

조선초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후 최초로 성곽을 조성할 때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두었다. 사대문으로 정북에 숙청문(肅淸門), 정동에 흥인문(興仁門), 정남에 숭례문(崇禮門), 정서에 돈의문(敦義門)을 설치했다. 사소문으로는 동북에 홍화문(弘化門: 후에 혜화문), 동남에 광희문(光熙門), 서남에 소덕문(昭德門: 후에 소의문), 서북에 창의문(彰義門)을 두었다. 이 중 소덕문이 서소문에 해당한다.

내용

서소문(西小門)의 원래 명칭은 소덕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를 비롯하여 각 사료에 소덕문이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태조대에 처음으로 성문을 열면서 소덕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며(『태조실록』 5년 9월 24일), 『세종실록』「지리지」 중 한양의 도성문을 기술할 때 등장한다. 이 두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 사료에서 소덕문 대신에 서소문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조선초 사료에는 서소문이 등장하지만 서소문의 형태나 변천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서소문이 계속 존치되었고 이곳을 통해 많은 사람이 왕래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한양 성곽은 임진왜란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본격적인 한양 성곽의 복구는 1704년(숙종 30)에 시작했다. 곳곳에 무너져 내린 성벽을 보수하고 다시 설치하는 공사가 몇 년간 계속됐다. 1711년(숙종 37)에는 광희문(光熙門)을 크게 중수하고 문루를 새롭게 설치했다. 광희문에 문루를 만들었지만 한참이 지난 1719년(숙종 45)에 현판 설치 논의가 있었다. 이때 서소문에도 문루를 만들고 현판을 내걸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숙종실록』 45년 1월 25일). 하지만 이후 서소문 문루에 대한 논의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현되지 못한 듯하다. 숙종대에 기록된 대부분 사료에도 서소문이 등장한다. 소덕문은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를 통틀어 단 한 번만 등장한다(『숙종실록』 33년 9월 14일).

영조대의 여러 사료에도 역시 소덕문이 아닌 서소문이 등장한다. 그런데 『승정원일기』 1738년(영조 14) 2월 14일자 기록 이후에는 서소문이 아닌 소덕문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소덕문의 문 1짝을 고쳐야 하며, 홍예 안쪽의 상복석(上覆石)이 부서져 떨어지려 해서 행인들이 매우 두려워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즉시 소덕문의 문짝과 홍예에 대한 수리가 진행되었다. 소덕문의 수리가 진행되면서 공사의 진척 및 완결 여부가 계속적으로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었다. 그해 9월까지도 수리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738년(영조 14) 10월 20일에 영조가 성문의 이름을 바꾸라고 지시했다. 『승정원일기』에는 “지난번 생기(省記)를 보다가 문득 소덕문이 있던데 이것이 과연 어떤 문인지 모르겠다. 이 두 글자는 휘호(徽號)인데 이는 심히 미안한 일이다. 그 문호는 당연히 고치도록 하라.”고 기록했다. 이틀 후인 10월 22일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들어 소덕문이 서소문이라는 것을 보고했고 이후 명칭 변경 작업이 진행됐다. 이때 갑자기 계속 사용해 오던 서소문이 아닌 소덕문이 등장한 사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특수한 상황으로 결국 문의 이름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휘호는 왕비가 돌아가신 다음에 시호(諡號)와 함께 올리는 호칭이다. 조선의 왕비 중에 소덕(昭德)이라는 휘호를 받은 사람은 예종의 비인 장순왕후(章順王后)이다. 장순왕후는 시호가 휘인소덕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였다. 시호나 휘호를 지을 때 유명한 문 이름과 겹치게 하는 경우는 드물다. 만약 겹치게 될 경우에는 문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장순왕후의 휘호가 서소문과 겹친 것을 약 250여 년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소덕문이라는 문호는 조선 개국 초에 일시적으로만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일이 있은 후 사료에서 소덕문은 등장하지 않고, 대신 소의문(昭義門)이 새롭게 등장한다(『영조실록』 20년 8월 4일). 1743년(영조 19) 11월 10일에 성문에는 초루(譙樓)가 있어야 하는데 서소문에는 초루가 없으므로 이번에 초루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승정원일기』 1744년(영조 20) 4월 1일자 기록에서 처음으로 ‘소의문초루영건(昭義門譙樓營建)’ 공사라고 해서 소의문이 등장한다. 소의문 초루 건설은 1744년 4월 2일에 시작해서 8월 4일에 마쳤고, 단청공사는 9월 10일에 마쳤다. 소의문의 현판은 서종옥(徐宗玉)이 쓰도록 했다.

왕실의 인산(因山)은 사대문을 이용한다. 하지만 왕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소문을 이용해 시신을 한양 밖으로 옮겼다. 한양 동쪽으로는 광희문을 이용했고, 서쪽으로는 서소문을 이용했다(『중종실록』 29년 8월 22일). 이런 까닭에 서소문 밖 아현동 일대에는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

사료를 검토해 보면 다른 대문들과 비교해 서소문에서 유독 형을 집행한 사례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사람을 동대문 밖에서 사형하는 것은 실로 미편합니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사(社)에서 죽인다.’ 했는데, 사는 서쪽에 있으니 예전 제도에 의하여 서소문 밖 성 밑 10리 양천(陽川) 지방, 예전 공암(孔巖) 북쪽으로 다시 장소를 정하소서.”라는 기록이 많이 참조가 된다(『태종실록』 16년 7월 17일). 결국 서소문에서 유독 형을 집행한 일이 많았던 이유는 『서경』의 예에 따라서 서쪽에서 형을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던 서소문은 1914년에 도시계획이 획정되면서 주변 성곽과 함께 철거되었다. 오늘날에도 서소문은 복원되지 못했고 지명만 전해진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서울특별시, 『서울건축사』, 서울특별시, 1999.
      1. 그림1_00017940_소의문 1, 『조선고적도보』 10권.
      2. 그림1_00017940_소의문 2, 『조선고적도보』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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