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복헌(集福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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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있었던 후궁들의 거처.

개설

집복헌(集福軒)은 창경궁에 있었던 후궁들의 처소로 숙종 말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집복헌에서는 1735년(영조 11)에 장헌세자(莊獻世子)가 태어나고, 1790년(정조 14)에 순조가 태어났다. 순조는 석복헌의 외헌(外軒)에서 원자 시절에 강학(講學)하였으며, 세자 시절에 관례(冠禮)와 책례(冊禮)를 치렀다. 1834년(순조 34)에 화재로 소실된 영춘헌(迎春軒)을 다시 지으면서 영춘헌의 부속 건물이 되었으며, 현재와 같은 건축 형태가 완성되었다.

위치 및 용도

집복헌은 창경궁에 있었던 후궁들의 거처이다. 또한 정조의 서재(書齋)로 잘 알려진 영춘헌의 부속 건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집복헌이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695년(숙종 21)에 제작된 『어제궁궐지(御製宮闕志)』의 본편에는 집복헌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신증편에 ‘집복헌은 통명전 동쪽에 있다[集福軒在通明殿之東].’라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숙종 말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집복헌에 관한 기록은 『영조실록』에서 가장 먼저 나온다. 대내(大內)의 여러 침실에서 흉하고 더러운 물건이 나와서 수리해야 한다는 내용에 집복헌이 등장한다. 이로써 집복헌이 침실의 기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영조실록』 6년 4월 1일). 영조 연간에 집복헌을 침실로 사용한 사람은 후궁 영빈이씨(暎嬪李氏)였다. 그녀는 집복헌에서 1735년(영조 11)에 장헌세자(莊獻世子)를 낳았다. 정조 연간에는 수빈박씨(綏嬪朴氏)가 집복헌을 거처로 사용하면서 1790년(정조 14)에 순조를 낳았다(『영조실록』 11년 1월 21일)(『정조실록』 14년 6월 18일).

집복헌이 영빈이씨와 수빈박씨의 거처로 활용되면서 장헌세자와 순조도 원자 시절을 집복헌에서 보냈다. 정조는 창경궁에 있는 영춘헌을 서재로 사용하면서 원자의 강학(講學)을 주도했으며, 왕세자의 관례와 책례도 집복헌의 외헌에서 치르도록 하였다. 1800년(정조 24)에 왕세자의 책봉례가 있던 해에 집복헌에서는 세자빈의 첫 번째 간택이 이루어졌다(『정조실록』 24년 2월 26일).

창경궁의 내전 일대는 1830년(순조 30)에 환경전(歡慶殿)에서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다시 복구되었는데, 이때 집복헌과 영춘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헌종 연간에 제작된 『궁궐지(宮闕志)』에는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행각이다.”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집복헌과 영춘헌이 연결되어 개축되면서 집복헌의 기능과 위상이 변화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집복헌에 관한 기록은 이후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1894년(고종 31) 5월에 왕이 잠시 머무르면서 정무를 본 기록이 있을 뿐이다.

집복헌은 창경궁의 통명전과 영춘헌의 가운데에 위치했는데, 1834년에 수개된 것이 현재까지 수리, 보수되면서 이어져 왔다.

형태

집복헌은 1834년(순조 34)에 영춘헌과 연결하여 건립되기 전후의 모습이 다르다. 이전의 모습은 「동궐도(東闕圖)」를 통해서 볼 수 있는데, 이때의 모습은 영춘헌의 북서쪽에 있으며 가운데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심 건물 뒤쪽으로 행각이 둘러싸 폐쇄적인 마당을 갖춘 형태이다. 1834년에 다시 지어진 집복헌은 주 건물은 거의 비슷하지만 주변이 달라졌다. 영춘헌이 동쪽으로 연결되어 건립되었고, 서쪽 행각이 사라졌으며, 집복헌 전면의 넓은 층계도 없어졌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내각일력(內閣日曆)』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 역사건축기술연구소, 『우리 궁궐을 아는 사전』, 돌베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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