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수진(靑水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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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의주부에 속한 만호진.

개설

청수진은 평안도 의주부의 압록강 연변에 설치한 관방시설로 최소한 고려 말부터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세종대에 만호(萬戶)를 새로 두고, 돌 보루를 쌓았다. 주로 건주여진(建州女眞)과 후금(後金)의 침략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후기에 그 중요도가 낮아지며 고종대에 혁파되었다.

위치 비정

현재 북한 평안북도 삭주군 청수노동자구에 위치한다.

자연 환경

청수진은 동쪽으로 수풍노동자구, 서쪽으로 사평노동자구, 남쪽으로는 남사노동자구와 연결되어 있다. 북은 중국 쪽으로 돌출된 형태이다. 북동쪽에 연대봉이 있으며, 이곳이 『여지도서』의 노토탄(老土灘)봉수로 보인다. 서쪽과 북쪽을 흐르는 압록강 연안에 취락이 발달하고 평북선과 청성(淸城)~수풍 도로가 지나간다. 압록강의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는 강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은 이 지역의 지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변천 및 현황

1378년(고려 우왕 4) 7월에 압록강 서쪽의 초적(草賊)이 청수구자(靑水口子)를 공격한 내용을 통해 고려 말부터 청수에 관방시설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청수는 소삭주(小朔州)·대삭주(大朔州)와 귀주(龜州)·안의(安義)·정녕(定寧) 등 각로(各路) 통행(通行)의 중앙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다(『세종실록』 22년 3월 1일).

1437년(세종 19) 1월에 세종은 평안도감사에게 청수구자가 방어에 요긴한 지역이기 때문이라며 의주의 동쪽을 분할하여 따로 한 읍을 설치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9년 1월 5일). 또한, 같은 해 6월에 평안도 강계의 고산리(高山里) 등과 함께 만호가 파견되었다(『세종실록』 19년 6월 14일). 이듬해 봄에 청수 등지에 목책 대신 돌 보루를 쌓고, 만호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키게 하며 보다 안정적인 방어태세를 갖추었다(『세종실록』 20년 1월 15일).

조선전기 평안도의 가장 큰 위협은 북쪽의 건주여진이었다. 조선이 평안도 연안에 방어체제를 구축한 것도 이들과 관련이 깊다. 청수진은 비교적 건주여진의 활동 지역보다 아래쪽에 있어서 만포, 벽단 등지보다 침입을 덜 받기는 했지만,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1499년 2월에 민가 20호를 불 지르고 노략해 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청수보의 체탐군이 압록강을 건넜다가 적에게 잡혀가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5년 2월 2일) (『연산군일기』 5년 6월 17일). 이에 연산군은 경변사(警邊使)이극균을 파견하여 순찰을 강화하였다.

이후 건주여진이 후금을 세우고, 입관(入關)한 뒤로 이 지역에 대한 방어의 중요도가 비교적 낮아졌다. 1721년(경종 1) 6월에 의주부윤(義州府尹)이명언이 상소하여 청수와 청성을 합하여 하나로 줄이고, 토병을 형편에 따라 증파하자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는 조정에 수용되지 못하였지만, 청수진의 위상이 조선전기와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경종실록』 1년 6월 16일).

한편, 이 시기에 접경지대에서 청과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조선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의주를 중심으로 밤낮으로 순찰하고, 장교를 파견하여 불법을 적발하도록 하였다. 청수는 상인들이 몰래 도강하는 장소 중 하나였기에 진장(鎭將)에게 엄격히 파수하도록 하고, 적발되면 처벌하라고 경고하였다(『정조실록』 17년 11월 17일). 이는 청수진의 임무가 방어뿐만 아니라 밀무역의 방지 등도 중요하게 작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말기에 이르면 이러한 일도 거의 사라졌다. 결국, 1883년(고종 20) 4월에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어윤중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청수 등을 혁파하였다(『고종실록』 20년 4월 4일).

형태

1492년(성종 23)에 청수석보성(靑水石堡城)을 쌓았는데, 높이는 9척(약 2.7m)이고 둘레는 800척(약 242.4m)이었다(『성종실록』 23년 3월 30일).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석축의 둘레가 1,686척(약 511m)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1493년에 쌓았다고 하여 『성종실록』의 기록과 1년의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서애집(西厓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북한편)』2,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2013.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2002.[[분류:조선시대 ->조선]][[분류:조선시대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