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명문(建明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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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으로 들어서는 정문.

개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에 들어서면 금천교가 놓여 있고 그 안에 건명문(建明門)이 있다. 건명문은 숭정전(崇政殿)의 전문(殿門)인 숭정문(崇政門) 밖에 위치한 정문이다.

경복궁의 경우는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을 들어서면 흥례문(興禮門)을 지나 영제교를 건너서 근정문(勤政門)과 근정전(勤政殿)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창덕궁의 경우는 돈화문(敦化門)을 들어서서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進善門)을 지나야 인정문(仁政門)과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경희궁의 건명문 역시 경복궁의 흥례문, 창덕궁의 진선문과 같이 궁궐의 정전 영역에 다가가기 전에 있는 문이다.

위치 및 용도

건명문은 경희궁 숭정전의 동남쪽에 있다. 정문인 흥화문 안쪽으로 금천교를 건너면 건명문이 있다. 경희궁의 정전 영역은 경희궁의 서쪽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건명문에서 숭정문까지의 거리는 다른 궁궐에 비해 꽤 먼 편이다. 건명문 밖 동북쪽에는 상의원(尙衣院)과 병조(兵曹)가 위치하였다.

영조는 건명문을 자주 활용하였다. 건명문 밖 마당에서 삭시사(朔試射)를 행하기도 하고, 죄인들을 국문하기도 하였다. 건명문에서 조참과 상참을 행하기도 하였는데, 본래 조참은 숭정전의 전문인 숭정문에서 행하는 것이지만, 영조는 건명문에서 조참을 행하였다(『영조실록』 38년 7월 21일). 건명문 밖 마당에서 백성들을 만나는 일도 자주 있었다.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하여 쌀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한양의 5부 백성들을 불러 마음을 묻기도 하였다(『영조실록』 38년 3월 9일)(『영조실록』 50년 1월 6일).

변천 및 현황

1617년(광해군 9)에 경희궁이 계획되어 1620년(광해군 12)에 완공되었다. 이때 건명문도 금천교 안쪽에 세워졌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창덕궁과 창경궁의 많은 전각이 소실되어 경희궁을 궁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숙종과 영조 연간에는 창덕궁을 동궐로, 경희궁을 서궐로 하여 자주 사용하였다. 숙종과 영조의 국장이 경희궁에서 이루어지면서 빈전인 자정전(資政殿)에서 산릉으로 발인할 때에는 숭정전과 숭정문을 지나 건명문을 통해 흥화문 밖으로 국장 행렬이 나섰다.

고종대에 이르러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에 경복궁이 완공되자 경희궁은 이궁으로 사용되지 못했으며, 경복궁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경희궁의 건물이 철거되기도 했다. 1868년에 경희궁의 공허지를 경작지로 분배할 즈음에 건명문은 이미 철거되었다.

형태

건명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
  • 은정태, 「고종시대의 경희궁-훼철과 활용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제34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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