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산성(公州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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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위치한 조선중기의 석성.

개설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현재의 공식 명칭은 공주 공산성이다. 475년(백제 문주왕 1)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백제 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백제의 중심 산성이었다.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중기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위치 및 용도

475년 고구려의 침입으로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이 폐허가 되자 백제 22대 문주왕이 현재의 공주인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고 공산성을 왕성으로 삼아 거처하였다. 그 후 538년(백제 성왕 16) 현재의 부여인 사비로 천도하기까지 백제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산성이 왕성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평지성보다 방어 기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변천 및 현황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을 피해 수도를 옮긴 뒤 54년간 왕성으로서의 기능을 한 공주산성은 사실상 형세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왜적의 방비책을 묻는 선조에게 당시 도체찰사였던 이원익(李元翼)은 “물가의 산성으로 안이 대접과 같아서 형세가 매우 낮고 좁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중간에 물에 막혀 있고 가운데에 언덕이 있으므로 조치하여 민가를 만들면 매우 좋으므로, 감사가 아속(衙屬)을 데리고 들어가서 지킬 생각입니다.”라고 덧붙였는데(『선조실록』 29년 11월 17일) 이는 “그곳의 형세가 썩 좋지는 않으나, 강을 굽어보는 형세로 전망이 틔어 있고 중요한 길목을 제압하고 있으므로 참으로 버릴 수 없는 곳입니다.”(『선조실록』 36년 12월 3일)라는 비변사의 보고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주요 교통로를 감시할 수 있는 요충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

해발 110m인 공산(公山)의 정상에서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산성(山城)이며 성의 둘레는 2,450m이다. 평면으로는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이며 사방에 석벽이 남아 있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돌로 쌓아 높이 약 2.5m인데, 전면만을 석축하였으며 내면은 토사·잡석으로 다져 붙였고, 너비는 3m이다. 동쪽 성벽 밖에 토성이 있는데, 높이는 무너져서 알 수 없으나 너비는 약 3m이다. 서쪽 성벽은 본래 토축(土築)된 위에 돌로 쌓아 외면만을 축조하여 높이는 4m 정도이다. 지금은 원형을 알 수 없는 서문 터 남쪽은 석재로 쌓았는데, 너비 4.5m, 높이 3m이다.

성벽 안에는 7∼8m의 호(壕)가 남아 있다. 북쪽에는 조잡한 석축성벽(石築城壁)이 높이 2m, 너비 1.5m 정도로 남아 있으며, 수구(水口)도 있다. 남쪽에 남문 터가 있고, 그 서쪽은 높이 3m, 너비 3.7m로 석축하였고, 성내에는 너비 11m의 호가 있다. 진남루 앞의 넓은 터는 백제의 궁터이고, 공북루(拱北樓)의 윗부분은 건물 터로 추정된다. 또, 이 부근에는 우물 터 세 개가 있다. 성내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靈隱寺)·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연못 터 등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안승주, 『公山城』, 공주사범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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