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산성행궁(廣州山城行宮)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9일 (토) 22:56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경기도 광주부남한산성 내부에 조선후기부터 말기까지 설치했던 왕의 행궁.

개설

왕이 궁궐에서 벗어나 외부의 숙소에서 임시로 숙박 혹은 경숙(經宿)하는 곳이 행궁이다. 왕이 도성 내외를 막론하고 숙소로 한번 결정하면 행궁의 명칭을 부여받았다. 왕이 어떤 곳에 행(幸)한다는 의미 자체가 그곳을 행궁으로 만드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대부분 도성을 벗어나 원거리를 행행하는 능행, 원행, 강무, 온행 시에 임시로 숙소를 만들거나 관사를 이용하면서 행궁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런데 왕은 행궁을 사용하지 않는 시기에는 고위 관원이나 지역 관장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행궁은 왕의 임시 처소로서 항구적인 궁의 역할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왕이 행행한 지역의 행정 명칭을 붙여 지칭하는 것이 많았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외침을 당해 왕이 임시로 피신하면서 이용한 곳이나 미리 왕실의 보장처에 행궁을 마련하면서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행궁은 시대에 따라 설립 배경에 차이가 있으며, 그 용도와 규모도 구별되었다. 광주산성행궁(廣州山城行宮)은 외침을 당한 이후에 건립되었으므로 다른 행궁과 달리 왕과 왕실의 안녕을 위해서만 사용되었다.

위치 및 용도

광주산성행궁은 왕과 왕실이 외침을 당했을 때 임시로 그 예봉을 피하기 위해 도성을 떠나 임시로 거처하려고 대비해 둔 보장처에 설립한 행궁이다. 광주산성행궁은 남한산성 내부에 있었으므로 왕실과 국가의 의례적인 일과 관련 없이 군사적인 대비용으로 만든 것이다. 실제로 1625년(인조 2)에 병자호란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산성을 축성할 때 성곽 수축에 앞서 행궁과 객관 등을 마련하였다. 행궁과 객관을 우선적으로 건설한 것은 산성 축조 시 관원과 인부들의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도체찰사장만(張晩)의 지휘하에 광주목사류림(柳琳)이 현장에서 행궁의 조성을 감독하였다.

변천 및 현황

1594년(선조 27) 임진왜란의 와중에 선조는 “남원산성(南原山城)은 지형이 극히 험난할 뿐 아니라 지역이 경상도와 연접해 있어 한 도의 보장처(『선조실록』 27년 7월 19일)라고 하여 인조대에 행궁을 만드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인조실록』 3년 6월 23일). 실제로 병자호란 때 인조의 보장처이면서 청나라 군대에 장기적으로 대항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인조 이후에는 숙종, 영조, 정조가 헌릉(憲陵)과 영릉(寧陵) 등에 능행하면서 국난을 당했던 선대의 감회를 잊지 않는 기념비적인 장소로 활용하였다[『숙종실록』 부록 숙종대왕행장](『영조실록』 6년 2월 25일)(『정조실록』 3년 8월 7일).

도성에 거주하는 왕이 산성행궁에 행행하려면 한강을 건너야 하는 여정이었다. 따라서 조선후기 왕 중에 이 행궁에 머문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정조대의 행행 여정을 보면, 도성을 나와 관왕묘(關王廟)→화양정(華陽亭)→광진(廣津) 주정소(晝停所)→선창소(船艙所)→율목정(栗木亭)→산성 남문(南門)→행궁으로 이어지는 길로 반드시 숙박을 해야 하는 위치였다(『정조실록』 3년 8월 3일). 따라서 행궁 인근의 영릉을 능행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평소에 왕이 행행하기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이에 따라 후대로 갈수록 사람이 사용하지 않아 행궁이 퇴락하자 1693년(숙종 19)에는 평상시에 부윤(府尹)이 거처하기도 하였다. 또한 훼손된 행궁의 보수를 위해 강원도의 나무들을 베어다 사용하였다. 왕이 사용하지 않는 행궁이라도 지역 관원들에 의해 늘 보수되고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많은 인원이 거주하지 않는 행궁이 퇴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761년(영조 37)에 이르러서는 강원도의 재목을 확보하지 못해 행궁을 보수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결국 정조대에 수도권 방위를 유수부 체제로 강화하면서 광주산성 내에 유수(留守)를 머물게 하고 행궁의 수리 및 보수를 담당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9년 8월 19일). 정조대에 산성 안에는 민호 1,000여 호가 있었고, 남자 2,000명과 여자 2,300명이 있었다(『정조실록』 3년 8월 3일).

1867년(고종 4)에는 고종이 헌릉과 인릉을 능행하면서 행궁을 이용하였다(『고종실록』 4년 9월 10일). 따라서 광주산성행궁은 조선말까지 행궁의 명색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행궁은 물론 주변 시설들도 파괴하였다. 1910년에 군청으로 사용되었고 1917년에는 면사무소, 그 이후에는 개인에게 불하되어 사라졌다.

형태

광주산성행궁은 광주산성의 주봉인 청량산(淸凉山)의 남쪽에 동남향으로 자리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적용하였다. 행궁의 구성을 보면, 인조대에 침전과 정당이 조성된 이후로 숙종대에 제사 용도로 건설한 재덕당(在德堂), 종묘와 사직의 위판을 두던 좌전과 우실을 두었으며, 1798년(정조 22)에 행궁 정문을 2층으로 만들고, 병자호란 삼주갑이던 1817년(순조 17)에는 완대정(緩帶亭)·우희정(又喜亭)·좌승당(坐勝堂)·유차산루(有此山樓)·칠사당(七事堂)·이위정(以威亭)·이명정(以明亭)·옥천정(玉泉亭) 등 320칸의 건물을 조성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광주산성행궁은 건립 이유가 외침에 대비하는 것이었으므로 이후의 왕들도 선대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국난을 대비하고 극복할 의지를 다지는 장소로 사용하여 그와 관련한 일화가 대부분이다. 1688년(숙종 14)에 숙종이 영릉에 능행하다가 행궁에 머물면서 병자호란 때 인조의 고충을 생각하며 양주(楊州)·광주(廣州)·여주(驪州)·이천(利川)의 봄철 대동미를 면제해 주었으며, 여주의 70세 이상 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렸다. 또한 인근의 백제왕 사당과 왕족, 병자호란 때 전사한 사람들의 무덤에도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전사자의 후손을 수용(收用)할 것을 명하였다[『숙종실록』 부록 숙종대왕행장].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배릉등록(拜陵謄錄)』
  • 『북한지(北漢誌)』
  • 『산성일기(山城日記)』
  •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
  • 『온궁일기(溫宮日記)』
  • 『온행등록(溫幸謄錄)』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훈국등록(訓局謄錄)』
  • 김문식, 「18세기 후반 정조 陵幸의 意義」, 『한국학보』88, 일지사, 1997.
  • 김문식, 「조선후기 국왕의 南漢山城 행차」, 『조선시대사학보』60, 2012.
  •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柳承宙, 「南漢山城의 行宮·客館·寺刹建立考」, 『韓國史硏究』120, 2003.
  • 이왕무, 「영조의 私親 宮·園 조성과 행행」, 『장서각』15, 2006.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