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골산성(龍骨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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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당시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던 평안북도 용천의 산성.

개설

평안도 용천에 있는 용골산(龍骨山)을 둘러싼 산성으로 고구려 때 처음 축성되었다고 한다. 조선전기에는 이 성에 대해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으나, 인조반정 이후 후금의 침공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용골산성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상하면서, 용천(龍川)과 의주(義州) 일대를 방어의 거점으로 주목하기 시작하였다(『인조실록』 3년 6월 19일). 이에 1624년(인조 2) 용천부사이희건이 용천 주민 이충급(李忠伋) 등과 함께 용골산에 100여 보의 산성을 축조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당시 의병장인 전 영산현감정봉수가 수천 명의 의병과 관군을 지휘하여 이 성에서 농성하면서 후금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승리하여 유명해졌다(『인조실록』 5년 3월 8일). 이후 여러 차례 개축되어 내성과 외성을 갖춘 산성으로 그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용골산은 주변에 황해도의 평야가 펼쳐져 있어 산에 올라서면 동남쪽으로 안악, 신천, 재령 등의 평야 지대와 서북쪽으로는 넓은 황해와 평안남도의 남포까지도 시야에 들어온다. 따라서 바닷길로 중국 등과 통하는 교통의 요충에 해당하는 곳이며 북방의 침입을 막는 거점으로서 의미가 적지 않았다(『인조실록』 10년 4월 24일).

변천 및 현황

정묘호란 직전인 1624년 용천부사이희건과 고을 주민 이충급, 이충익(李忠翼)의 감독으로 100여 보의 규모로 수축된 용골산성은 정묘호란 당시 정봉수의 활약으로 후금군을 격퇴하자 그 군사적 중요성이 재인식되었다. 이에 용천부 관아를 이 산성 안으로 이전하기도 하였으나 청의 요구로 1641년(인조 19) 1월 다시 의주 경계 부근의 양책참(良策站)으로 옮기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9년 1월 22일). 1692년(숙종 18)에 용천부사정홍좌(鄭弘佐)가 남쪽 방면 600여 보를 새로 쌓았고 1704년(숙종 30)에는 용천부사김영종(金永宗)이 별도로 내성을 축조하였다. 이후 용골산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춘 이중 성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형태

용골산성이 있는 용골산은 일명 용호산(龍虎山)이라 불리며 용천부의 동쪽 8리(약 3㎞)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서쪽으로 서해와 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압록강이 보이는 등 시계가 매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의주 쪽의 경치가 잘 보이며 의주에서 한성으로 내려가는 의주대로를 바라볼 수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에는 외성만 있었지만 1704년(숙종 30) 내성을 축조하여 이중성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외성은 석축(石築)으로 둘레 370보(약 673m), 높이 3장(약 9m)이며, 성곽의 주요 시설로는 치첩(雉堞) 55타(垜), 곡성(曲城) 11개소, 옹성(甕城) 1개소, 성문 2개소, 포루(砲樓) 3개소 등이 있었다. 외성은 석축으로서 둘레 1,373보(약 2.5㎞), 높이 3장의 규모로서 성곽 시설로는 성가퀴 316타, 옹성 1개소, 성문 6개소, 포루 7개소, 그리고 장대(將臺) 1개소 등이 있었다. 산성 내에는 연못 1개소와 제승당(制勝堂)과 군기고(軍器庫) 등이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이 침입하여 의주와 창성이 함락되자 용천부사이희건은 휘하의 군병 500여 명과 주민들을 이끌고 용골산성으로 이동하여 후금과의 장기전을 시도하고 후금군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후금군이 성을 포위하자 이희건은 성내 민심을 수습한 중군이충걸과 협수장장사준에게 용골산성의 방어를 일임하고 자신은 100여 명의 소수 병력을 지휘하여 후금군의 이동로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희건의 유격 부대는 산성을 나서자마자 후금의 기병대로부터 포위당하여 이희건 이하 100여 명의 군사들이 대부분 전사하였다. 여세를 몰아 후금군이 용골산성을 공격하자 이충걸은 도주하고 장사준마저 후금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산성의 주민들은 이곳에 피난 와 있던 전 영산현감정봉수를 대장으로 추대하여 산성을 방어하기 시작하였다. 성안의 방어군이 완강한 저항을 보이자 후금군은 1월 16일 다시 성을 공격하였으나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 이후 3월 초 조선과 후금 사이에 화의가 성립된 이후에도 용골산성의 조선군은 해산을 거부하고 계속 농성하자 후금은 3월 27일 총대장 아민의 지휘하에 용골산성을 총공격하였으나 조선군의 저항으로 큰 피해를 입고 정주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4월 13일 조정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농성함에 따라 후금은 1만여 명의 대군으로 공격하였으나 다시 패배하였다. 산성이 장기간 고립됨에 따라 산성을 탈출하는 군민이 늘어나면서 정봉수는 6월 14일 남은 인원을 이끌고 용골산성을 떠나 철산 앞바다의 대계도(大鷄島)로 이동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풍천유향(風泉遺響)』
  • 『여지도서(輿地圖書)』
  • 유재성, 『병자호란사』,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6.
  • 강석화,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압록강변의 방어체계」, 『한국문화』3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한연구소, 2004.
  • 노영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내지 거점방어체계」, 『한국문화』3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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