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문(宣義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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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나성의 서대문.

개설

개경의 나성(羅城)은 고려시대 1009년(고려 목종 12) 3월에 거란의 2차 침입에 대비해 강감찬(姜邯贊)이 개경 외곽에 외성을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건립되었다. 성곽의 완성은 건립을 시작한 지 21년 만인 1029년(고려 현종 20) 8월에 마쳤다. 나성의 사방에는 사대문을 설치했고, 중간에 성문 8개와 소문 13개를 설치해 총 25개의 문을 설치했다. 사대문의 명칭은 시대마다 조금씩 달리 기록되었다. 동대문은 숭인문(崇仁門)으로 변화가 없었지만, 서대문은 선의문(宣義門) 또는 오정문(午正門), 남문은 회빈문(會賓門) 또는 비전문(碑篆門), 북문은 자안문(紫安門) 또는 북창문(北昌門)으로도 불렸다.

서대문인 선인문과 동대문인 숭인문 사이에는 개경을 가로지르는 동서대로를 설치했다. 동서대로 중간 부분에서 북쪽으로 황성의 광화문(廣化門), 남쪽으로 남문인 회빈문을 연결하는 가로를 두어 서로 교차해서 십자로를 형성했다. 이 십자로가 개경의 중심도로이며 이 도로를 중심으로 개경 시내의 골격이 만들어졌다.

내용

『조선왕조실록』에서 선의문은 태조와 태종대에만 등장한다. 태조와 태종은 새로운 수도인 한양보다 개경에 머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왕이나 태상왕이 개경의 서쪽으로 출입할 경우에 선인문이 등장한다. 일반적인 선의문 출입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과 명나라 간에 오고간 사신 왕래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거나 돌아오는 경우, 명나라 사신이 개경에 도착하거나 떠나는 경우에 왕이 직접 선의문까지 나가 이들을 맞아들이거나 전송했다(『태조실록』 1년 10월 22일). 개경의 서문인 선의문을 통해 사신이 왕래한 것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일이다. 고려시대에 송(宋)나라 사신들은 배를 타고 벽란도(碧瀾島)에 도착했다. 벽란도는 개경의 서쪽에 위치한 항구였다. 따라서 벽란도에서 출발한 사신들은 자연스럽게 개경의 서대문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전하는 사료만으로 선의문의 모습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1123년(고려 인종 1)에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이라는 사람이 송나라로 돌아가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 책의 「문궐(門闕)」조에 당시 선의문의 모습이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서긍은 선의문에 대해 “왕성의 정서문(正西門)인데 서쪽은 금방(金方)이며 오상(五常)에서 의(義)에 해당하기 때문에 선의문이라고 이름 지었다. 정문은 옹성(瓮城)을 두어 이중으로 구성했고 위에는 누각을 꾸몄다. 선의문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따로 편문을 두어 군사가 이를 지켰다. 중앙의 문은 항상 열어 놓지 않고 오직 왕과 사신만이 출입할 수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편문을 통해 출입한다. 벽란정(碧瀾亭)에서부터 서교(西郊)에 이르러 바로 이 문을 지나야 관(館)에 들어갈 수 있다. 왕성의 문들 중에서 이 문이 가장 크고 화려하다. 이 문은 송나라 사신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라고 했다. 또 「외문(外門)」조에서는 선인문을 통해 양주(楊州)·전주(全州)·나주(羅州) 등 3주로 나간다고 했다.

참고문헌

  • 『고려도경(高麗圖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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