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룡문(銅龍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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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세자궁과 선인문 사이에 위치한 문.

개설

동룡문(銅龍門)은 중국 한(漢)나라 때 태자궁의 문루를 지칭하는 명칭이었다. 이 문루에는 구리로 만든 용이 장식되어 용루(龍樓)라고도 불렸다. 이런 까닭에 동룡문은 창경궁에 만들어진 실제 문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자궁, 즉 춘궁(春宮) 또는 동궁(東宮)을 달리 부르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내용

조선 왕실에서는 원자가 탄생한 것에 대해 “동룡문이 열렸다.”와 같이 표현하였다. 동룡문 대신에 동룡(銅龍) 또는 동위(銅闈)도 역시 세자궁을 지칭하는 명칭이었다(『연산군일기』 11년 8월 26일).

창경궁에 위치한 동룡문은 세자궁의 동쪽에 위치하기는 하지만 세자궁 담장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어 명확히 세자궁의 동문이라고 지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동룡문 동쪽에는 매우 넓은 마당이 만들어졌고 마당 동쪽 끝에는 금천과 선인문(宣仁門)이 있어 이를 통해 창경궁에 출입하였다. 이런 까닭에 동룡문이 문의 명칭으로 고문헌에 나올 때에는 왕이 창덕궁에서 창경궁을 거쳐 외부로 출궁하거나, 세자가 동궁에서 나와 외부로 출궁할 때 통과하는 경유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된 동룡문은 단칸의 대문으로 남과 북의 담장에 연결된 모습이다. 하지만 대한제국기의 기록인 『궁궐지(宮闕誌)』에서는 ‘동룡문이 1칸, 남과 북행각이 합해서 6칸’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동궐도형」에서도 동룡문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3칸의 마루[廳]가, 남쪽에는 3칸의 방(房)이 놓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19세기에 동룡문의 형태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동궐도」에 따르면 창경궁의 선인문을 지나 동룡문에 들어서면 서북편에 넓은 마당이 펼쳐지는데 마당 북쪽에는 계방(桂坊)이 위치하고, 마당 남쪽에는 춘방(春坊)이 위치한다. 마당의 서쪽 끝에는 2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쪽이 집현문(集賢門), 남쪽이 집영문(集英門)이다. 두 문은 모두 2칸으로 만들어졌다. 북쪽의 1칸은 솟을대문 형식이며, 남쪽의 1칸은 협문(夾門) 형식이다. 1648년(인조 26)에 동궁을 수리한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에는 두 대문에 내건 현판의 형태가 기록되었다. 집영문의 현판은 테두리가 있고 석자황을 칠한 반면, 집현문의 현판은 테두리가 없다고 했다. 따라서 집영문의 위계가 휠씬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이나 세자는 집영문을 통과해 동궁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동궐도」
      1. 그림1_00017959_「동궐도」, 창경궁 세자궁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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