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회묘(順懷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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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제향을 모시기 위한 사묘(祀廟).

개설

순회세자는 1557년(명종 12)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로 요절하였다. 순회묘의 건립과 운영은 이후 소현세자(昭顯世子), 효장세자(孝章世子),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사묘를 건립하고 운영하는 데 중요한 전례가 되었다. 1647년(인조 25)에는 인조의 아들이었던 소현세자의 신위를 합하여 순회묘 또는 소현묘(昭顯廟)라 불렀다(『인조실록』 25년 2월 10일). 영조대에 순회세자의 신위를 옮겨 그 무덤 앞에 묻은 후로는 소현묘로의 기능만 했다.

위치 및 용도

순회묘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사재감계(司宰監契)에 위치했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일대이다. 선조 연간에 명종의 아들이자 세자의 신분으로 요절한 순회세자를 제향하기 위한 사묘로 건립되었다(『선조실록』 34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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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순회세자가 13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은 1563년(명종 18) 9월 20일이었다. 세자로 있다가 졸(卒)하였으므로 사묘를 세워 봉안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소실되어 임시 처소에 봉안하였다. 1601년(선조 34) 한양을 복구하면서 순회묘도 같이 건립되었다. 1603년(선조 36)에 비로소 공회빈(恭懷嬪) 윤씨(尹氏)의 신주(神主)와 함께 순회세자의 신주를 순회묘에 봉안했다.

1647년(인조 25)에는 소현세자의 묘(廟)를 순회묘에 부묘(祔廟)하였다. 이때 묘우(廟宇)가 3칸이었는데 순회세자의 신주가 정중앙에 봉안되어 있고, 의물(儀物)로서 인갑(印匣)과 일산(日傘)이 있었다. 소현세자의 책·인장·우산·부채·일산 등을 배설하기에는 협소하여 한 칸을 더 증축했다.

영조대에 이르러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신주를 묘소에 묻고 제사는 묘각(墓閣)에서 한 차례만 지내도록 하면서 순회묘는 없어졌다. 소현묘는 정조대에 조천하였으므로 이후에는 소현묘로만 불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