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산보(松山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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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의주군에 설치하여 권관이 관장하던 진보.

개설

송산보는 평안도 강변(江邊) 7읍(邑) 중 하나인 의주부(義州府)에 설치한 군사시설이다. 강변 7읍은 압록강 이북으로부터 이민족의 침입을 일차적으로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중에서도 의주부는 압록강의 하류 지점에 위치하여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대규모 침입에 대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의주부는 중국과 조선의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오가는 길에 위치하여 군사적·외교적 중요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송산보는 의주부의 압록강 변이 아닌 내지에 설치되어 평양 방면으로 가는 적을 차단하고 도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평안도 의주부 동쪽으로 12리(약 4.7㎞)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내지에 위치하였다. 송산보 뒤쪽으로는 송산(松山)이 있었고, 앞으로는 압록강과 이어진 한천(漢川)이 흐르고 있었다. 의주부는 북경과 가장 가까운 압록강 하류에 위치하여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겨울철에 압록강이 얼 경우 대규모 군대가 손쉽게 도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주부의 압록강 변에는 방어 목적의 진보가 다수 설치되었다. 송산보는 압록강을 건넌 적군이 한천을 따라 내려올 경우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의주부는 외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조선에서 파견한 사신들은 의주부 인근에서 숙식을 한 후 강을 건넜으며, 중국 사신들의 조선 방문도 의주부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의주부에는 다양한 숙식 장소들이 마련되었는데, 송산보도 그러한 곳 중 하나였다.

변천 및 현황

1455년(세조 1) 처음 실록에 등장한다. 명나라로 떠난 주문사(奏聞使)김하(金何)가 조칙(詔勅)을 받아 오면서 송산보를 지났다는 내용이다(『세조실록』 1년 10월 13일). 이 기사에서도 송산보가 중국을 오가는 데 경유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송산보 인근에는 조선전기부터 송산연대(松山烟臺)가 있어서 비상 연락체계를 갖추었다. 송산보는 『효종실록』을 끝으로 연대기 사료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의주부 진보 편제에서도 빠진 것으로 보아 17세기 중반 혁파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

송산보에는 벽돌[甎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855척(약 259m), 높이가 8척(약 2.4m)이다. 1526년(중종 21) 보(堡) 안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민가와 성이 다 탔는데, 절도사(節度使)정윤겸(鄭允謙)이 고쳐서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41년(인조 19) 명나라와 청나라가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의 기병들이 도주하여 송산보로 들어갔다고 한다(『인조실록』 19년 9월 21일). 이 기사는 인조 후반까지도 송산보에 방어적 기능을 할 수 있는 목책이나 성곽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속대전(續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인재집(訒齋集)』
  • 강석화,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압록강변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고승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도로 방어체제의 정비」,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고려사학회, 2002.
  • 임성수, 「18세기 평안도 진보재정의 운영과 변화」, 『한국사학보』46, 고려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