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洗劍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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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창의문 밖 탕춘대 홍제천 암반 위에 세운 정(丁) 자형 정자.

개설

세검정(洗劍亭)은 한양 도성 창의문 밖 탕춘대 홍제천 암반 위에 세운 정 자형 정자이다. 현재 형태는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세검정도(洗劍亭圖)」를 바탕으로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위치 및 용도

오늘날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에 있다. 이 일대는 한양 도성의 서북쪽 밖 삼각산과 백악산을 조망할 수 있는 주변 경관이 수려한 지역이다. 더불어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이 연계된 지점으로 도성 수비 체계에서 중요한 위치이다.

조성 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정조가 연융대에서 활쏘기를 한 후 세검정에서 쉬었다고 하며(『정조실록』 14년 9월 19일),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조선왕조실록』이 완성된 뒤 세검정 천변에서 세초(洗草)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여염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에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흐르는 사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의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유세검정기(遊洗劍亭記)」에는 폭우가 내렸을 때 변모한 홍제천의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었다.

변천 및 현황

세검정을 처음 조성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연산군의 유흥을 위한 용도, 숙종의 북한산성과 관련한 군인 쉼터 용도, 영조의 총융청 이전 후 군인 휴식 공간 용도로 조성했다는 3가지 설이 전해진다. 다만 세검정이란 명칭은 『궁궐지(宮闕志)』에 인조반정 때 이귀(李貴)와 김류(金鎏) 등 반정인사들이 이곳에서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정조대에는 북한산성과 연계된 수비 체계에서 경리청을 북한산성에 이속한 후 세검정에 머물면서 대비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정조실록』 2년 6월 24일). 또 연융대에서 진행된 별시사(別試射) 후 세검정에 들렀다는 내용이 나온다(『정조실록』 3년 8월 19일). 정조는 「세검정폭(洗劍亭暴)」이라는 시에서 세검정 주변의 겨울 풍경을 묘사하였다.

조선후기에 겸재정선은 부채에 홍제천 암반 위의 「세검정도」를 그렸다. 이를 통해 당시 정자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그림에서 정자는 후면이 담장으로 둘러진 정 자형이다. 길 방향에는 일각문이 그려져 있고, 홍제천으로 내려가는 편문을 두어 내려갈 수 있도록 했다. 19세기 중반에 유숙(劉淑)이 그린 「세검정도」는 홍제천변에 담장으로 둘러진 팔작지붕의 누정으로 표현하여 정선의 그림과는 형태가 다르다.

세검정은 1941년에 주변에 있던 종이공장의 화재 때 소실되었다. 이후 주초 하나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 11월 11일에 기념물 4호로 지정했고, 1977년 5월에 정선의 「세검정도」에 등장하는 형태로 복원했다.

형태

세검정에는 영종(英宗)의 어제시 현판이 있다고 전해진다(『정조실록』 14년 9월 19일). 지금의 형태는 1941년에 화재로 소실된 터에 1977년에 정선의 「세검정도」를 참고하여 복원했다. 자연암반 위 네모난 지역에 각기 높이가 다른 10개의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정 자형으로 지었다. 정자의 방향은 서남향으로 가운데 칸이 넓고 협칸이 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정자의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주변에 아(亞) 자형 난간을 둘렀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한경지략(漢京識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