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당지(春塘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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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에 창경궁 춘당대 앞에 조성한 연못.

개설

춘당지(春塘池)는 창경궁 내에 있는 연못이다. 1909년(융희 3)에 춘당대(春塘臺) 앞 귄농장 자리에 연못을 파고, 춘당지라고 이름 붙였다.

위치 및 용도

춘당지는 현재 창경궁 후원에 있다. 원래는 창덕궁 후원에 있던 춘당대였으나 연못으로 조성한 후, 현재는 창경궁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헌종대에 쓰인 『궁궐지(宮闕志)』에 의하면, 춘당대는 영화당의 남쪽에 있으며, 췌시(萃詩)하던 장소로 동쪽에 못이 있다. 춘당대는 서총대의 공간을 계승하여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서총대와 공존하는 공간이었지만, 춘당대는 ‘연못 당(塘)’ 자로 작명된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동쪽의 지당을 낀 마당을 한정해서 부르던 공간이었다.

변천 및 현황

『조선왕조실록』에서 춘당대는 1503년(연산군 9)에 돌을 갈아 고쳐 쌓으라는 기사로 처음 등장한다(『연산군일기』 9년 9월 10일). 이후 춘당대에서 왕은 활쏘기를 관람하거나(『중종실록』 11년 2월 7일), 기우제를 지냈으며(『중종실록』 21년 5월 14일),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중종실록』 23년 12월 30일). 고종대까지도 춘당대에서 정시가 이루어지는(『고종실록』 3년 3월 26일) 등 1894년(고종 31)까지 활발하게 ‘장(場)’의 기능을 했다.

1909년에 춘당대 앞 귄농장 자리에 창덕궁을 둘러싼 언덕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냇물을 모아 연못을 파고 춘당지라고 이름 붙였다. 연못가에 수정을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꾸었으나, 창경궁을 복원하면서 연못으로만 정비하였다. 춘당대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큰 변화를 겪었다.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인위적인 관리용 경계 시설물을 설치하면서 춘당대의 권역도 억지로 분리해 버렸다. 게다가 영화당(暎花堂), 의춘문(宜春門)을 잇는 담장까지 철거하여 부용정이 있는 공간과 춘당대의 구분이 사라졌는데, 해방 이후 지금까지 이러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형태

춘당지는 전통 양식보다는 일제의 영향이 나타난다.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버드나무, 참나무 등의 수림이 울창하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정우진·권오만·심우경, 「고종 연간에 조성된 궁궐 후원 다용도 공지(空地)의 활용양상」, 『한국전통조경학회지』 4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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