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례문(明禮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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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서쪽에 위치한 대보단 출입문.

개설

대보단(大報壇)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조선을 도운 명나라 신종(神宗)을 향사하기 위해 만든 제사 시설이다. 1704년(숙종 30)에 예조 판서민진후(閔鎭厚)가 제안해 건립하였다. 창덕궁 서북쪽에 위치하였으며 궁장 바깥쪽에 연접해서 만들었다. 대보단에는 중문으로 열천문(冽泉門), 남문으로 공북문(拱北門), 동문으로 조종문(朝宗門)을 두었다. 한편 대보단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창덕궁 후원 영역에도 문을 하나 두었는데, 이 문이 명례문(明禮門)이다.

내용

『승정원일기』 1704년(숙종 30) 11월 13일자 기록에는 대보단을 설치할 때 사용할 제기(祭器)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의례를 진행할 때 신하들이 어떤 통로를 이용해야 할지, 대보단에 수직군사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의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명례문은 주방(酒房) 뒤쪽에 있는 작은 문[小門]으로 대보단과 무관하게 이미 창덕궁 후원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때 대보단에 드나드는 출입문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원래는 대보단에서 의례가 치러질 때 신하들이 창덕궁의 서북쪽 출입문인 요금문을 통해 궁성 안쪽으로 들어와서 명례문을 거쳐 조종문을 통해 대보단에 들어가도록 계획했다. 하지만 명례문이 창덕궁 후원 내부에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신하가 후원을 통과해서 대보단에 나가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안으로 대보단 남쪽에 행각을 만들고 여기에 나중에 공북문(拱北門)이 되는 작은 문[小門]을 두어 신하들이 이곳을 통해 출입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신하들이 전혀 창덕궁 내부로 들어올 필요가 없이 궁장 바깥으로 난 길을 통해 대보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신 명례문에는 훨씬 중요한 기능을 추가하였다. 대보단에 향축(香祝)을 보낼 때 향축이 통과하는 문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기존 명례문은 향축이 지나가기에 너무 작아서 새로 크게 만들었다. 또 향축이 출발하는 인정문에서부터 명례문까지 길도 새로 만들었다. 한편 이곳에 있던 내의원 주방(內醫院酒房)은 내빙고(內氷庫) 뒤쪽으로 이건했다.

1797년(정조 21)에 대보단에서 춘향(春享)을 지낼 때 기존에는 향축이 돈화문을 통해 대보단으로 나갔는데, 우회하지 말고 명례문을 통과하도록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정조실록』 21년 3월 2일). 처음 대보단을 만들 때 향축의 통과를 위해 명례문을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의절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90년(정조 14)에는 명례문 안쪽에 4칸 반 크기의 한려청(漢旅廳)이 들어섰다. 『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훈련도감(訓鍊都監)에 따르면 한려는 효종이 심양(瀋陽)에서 환국할 때 8성(姓)의 한인(漢人)들이 호종해서 조선에 왔는데 그 후손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한인 아병(牙兵)’이라고 했다가, 1790년(정조 14)에 ‘한려’라고 명칭을 고치고 대보단 지키는 일을 맡겼다(『정조실록』 14년 3월 19일)(『정조실록』 14년 3월 19일).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된 명례문은 2칸의 모습이다. 동쪽의 1칸은 솟을대문 형식이고, 서쪽의 1칸은 동쪽보다 높이가 낮은 협문(夾門) 형식이다. 동쪽 솟을대문이 향로(香路), 서쪽 협문이 어로(御路)인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만기요람(萬機要覽)』「동궐도(東闕圖)」
  •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2, 서울학연구소, 199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