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련정(愛蓮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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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대에 창덕궁 후원에 조성한 정자.

개설

애련정(愛蓮亭)은 숙종이 창덕궁 후원에 연꽃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조성한 정자이다. 애련정 일원은 구릉과 계류를 활용하여 그 일부를 정지해 전옥(殿屋)과 정자를 세우고, 계류를 막아 연못을 만들어 원유(苑囿) 공간을 조영해 정자에서의 정적인 관상이나 유락에 그치지 않고 자연의 숲을 즐기는 소요(逍遙)를 위한 공간이다.

위치 및 용도

애련정은 창덕궁 후원에 위치해 있다. 헌종대에 쓰인 『궁궐지(宮闕志)』에는 어수당(魚水堂)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었는데, 어수당은 현존하지 않는다. 숙종의 「어제기(御製記)」에 숙종이 연꽃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자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는 내용이 있다. 숙종과 정조는 이곳을 특별히 여겨 시를 짓고 향유했다.

변천 및 현황

숙종이 1692년(숙종 18)에 조성했다. 동쪽에 석문이 있는데 살곶이벌이라 하였다. 정자의 남쪽에는 함벽정(涵碧亭) 터가 있었는데 폐하였고, 석문 밖의 지당을 불로지(不老池)라 일컬었다. 『궁궐지』에는 연못 가운데에 섬을 쌓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섬을 확인하기 어렵다. 「동궐도(東闕圖)」에 보이는 호안의 모습으로 변화된 시기는 지금으로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형태

애련정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각 형태의 정자이다. 네 기둥 가운데 남쪽 정면의 기둥 2개는 연못 속에 박은 장주형 초석 위에 세워졌는데, 이로 인해 연못 속으로 몸체를 드러낸 형태가 되었다. 정자에 오르면 연못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구조이다. 북쪽의 기둥 2개는 장대석의 1벌대 기단에 놓인 초석 위에 세워졌다. 양식은 단층 네모기와지붕인 익공집이며, 마루는 난간을 두른 쪽마루보다 한단 낮게 꾸며져서 난간 쪽마루가 마치 의자와도 같은 구실을 한다.

불로문을 들어서면 넓은 공간을 지나 정면에 연와담이 있다. 불로문 내측은 동·서·남쪽이 담으로 막혀 있고, 북쪽만 애련지에 접해 열린 특이한 공간 구성이다. 이는 애련지와 동일한 목적을 가진 행사 장소인 기오헌, 의두각에서 애련지를 조망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애련정의 후면은 어수당에서부터 평탄한 단이 계속되는데, 이 단의 북쪽은 자연 구릉이다. 그곳에는 석대에 앉혀진 괴석이 애련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1기씩 대칭으로 위치하며, 뒤쪽 언덕에는 괴석을 배경으로 소나무가 심겼다.

애련지 못가에 있는 돌에 태액(太液)이라는 금석문이 새겨져 있다. 애련지 서북쪽은 3층의 계단을 이루는데, 중앙층의 맨 좌측 돌에 글씨를 새겼다. 이로 인해 애련지의 다른 이름이 ‘태액지(太液池)’였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태액은 큰물이라는 뜻으로, 원래 중국 한나라의 건장궁(建章宮) 북쪽에 있던 연못 이름이었다. 당나라 때도 대명궁(大明宮) 함량전(含凉殿) 뒤쪽에 같은 이름의 연못이 있었는데, 당대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유명한 「장한가(長恨歌)」에 ‘태액지의 연꽃과 미앙궁의 버들이로다[太液芙蓉未央柳]’라는 구절이 나온다. 청나라 때 북경의 고궁 서화문(西華門) 밖에 같은 이름의 연못이 있었다.

애련정 일원에는 석함(石函)·석문·석누조(石漏槽) 등이 위치하며, 해치나 연판문·용두(龍頭)의 문양이 새겨졌다. 석함의 경우 애련정 좌우에 하나씩 존재하는데, 좌측 석함에 새겨진 서수(瑞獸)의 경우 뿔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해치로 사료되며, 우측 석함은 연판문으로 장식되었다.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조영된 석문인 불로문은 큰 돌을 쪼아 만들어 이음새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석누조에는 벽사의 의미인 용두가 나타나 있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
  • 이광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 최종덕,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눌와, 2006.
  • 한국전통조경학회, 『동양조경문화사』, 대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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