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견성(伏見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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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豊臣秀吉)이 은거할 목적으로 경도(京都) 복견(伏見)의 구릉에 축조한 근세 성곽.

개설

경도시 복견구에 있었던 평산성(平山城)이다. 1594년 풍신수길이 지월산(指月山)에 착공하였으나 1596년 지진으로 붕괴되고 우치천(宇治川) 근처에 있는 목번산(木幡山)에 다시 지었다. 풍신수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풍신수뢰(豊臣秀賴)가 대판성(大坂城)을 본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덕천가강(徳川家康)이 입성하였다. 풍신가문이 멸망한 후 1623년 막부(幕府)의 명령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위치

경도시(京都市) 복견구(伏見區) 도산정(桃山町) 니노마루[二ノ丸] 일대.

변천 및 현황

1592년 풍신수길이 은거할 성을 쌓기 위하여 복견에 있는 구릉 남쪽 기슭 지월(指月)에서 측량을 시작하였고 159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건설에 들어갔다. 성 아래 지역에는 유력 대명(大名)들도 앞 다투어 저택을 지었다. 임진왜란 강화교섭 중 명나라에서 파견된 책봉사와 조선에서 파견된 통신사 일행을 접견할 장소로 예정되었으나 1596년 윤7월 13일 대지진이 일어나 붕괴되었다. 대지진 후 지월에서 목번산으로 지역을 옮겨 복견성은 재건되었다. 이듬해 5월 풍신수길과 그 아들 풍신수뢰가 옮겨 왔다. 같은 해 10월 학문소(學問所)·다정(茶亭)도 완성되고 성 아래 마을도 정비되면서 중앙 정치의 장이 되었다.

1600년 관원(關ヶ原) 전투 때 일부가 파괴되었다가 1602년부터 본격적인 복구공사로 재건되어 경도의 이조성(二条城)과 더불어 덕천가강의 거성으로서 서일본 지배의 거점이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탈출한 강사준(姜士俊)과 여진덕(余進德) 등의 보고에 덕천가강이 풍신수길이 사망한 후 그의 가신들을 처리하고 복견성으로 들어갔다는 내용이 있다(『선조실록』 34년 4월 25일).

1607년 덕천가강이 준부성(駿府城)으로 본거지를 옮긴 후 1619년 복견성을 파괴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부터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주요 건물은 대덕사(大德寺), 서본원사(西本願寺) 등으로 옮겨졌다. 성이 있었던 곳에는 명치천황(明治天皇) 의 도산릉(桃山陵)이 조성되었다. 현재 흙으로 쌓아 올린 성채(城砦)와 해자(垓字)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三省堂編修所, 『日本地名事典』, 三省堂, 2007.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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