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문(迎詔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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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에 모화관 앞에 설치한 대문.

개설

모화관(慕華館)은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위치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할 때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만든 건물이다. 1407년(태종 14)에 태종이 개경의 연빈관(延賓館)을 모방해서 관사를 짓고, 문신들에게 이름을 짓게 했는데 성석린(成石璘)이 모화(慕華)라는 이름을 제안해 모화루라고 편액했다. 1430년(세종 12)에는 모화루를 수리한 후 이름을 바꿔 모화관이라고 했다.

영조문(迎詔門)은 모화루 정면에 세운 문이며 이곳에서 왕이 직접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받았다. 영조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 1425년(세종 7)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판단하건대 모화루 건립과 동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세종실록』 7년 10월 29일). 최초의 영조문은 단순한 홍살문 형태를 하고 있었고 규모 또한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영조문에서 치러지는 의식이 워낙 중요한 것이어서 영조문을 크고 화려하게 만들자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됐다.

내용

1478년(성종 9)에 영조문을 수리한 일이 있었다(『성종실록』 9년 6월 10일). 선공감(繕工監)에서 기존과 다른 새로운 영조문 모형을 왕에게 만들어 바쳤다. 이 모형은 중국의 패루 형태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종은 건물이 너무 사치스럽다면서 기존의 홍살문 형식으로 다시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1526년(중종 21)에도 영조문을 새롭게 조성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중종실록』 21년 6월 13일). 예조(禮曹)에서 기존의 영조문이 너무 초라하니 3칸짜리 중국 패루 형식으로 변경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 제안 역시 규모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537년(중종 32)에 또 다시 영조문을 크게 중수하자는 의견이 나왔다(『중종실록』 32년 1월 2일). 『중종실록』에는 삼공(三公)의 건의라고 기록했지만 여러 사료를 통해 김안로(金安老)의 제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중종실록』에는 새로운 영조문의 형태에 대해 주택의 일각문(一閣門) 형태를 따랐고 지붕에 기와를 덮었다고 했다. 한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漢京識略)』「모화관조」에는 두 기둥의 대문인 쌍주일문(雙柱一門)을 건립했고, 청기와로 지붕을 덮었다고 기록되었다. 새롭게 만든 문의 명칭에서도 2가지 기록이 혼재하는데, 『조선왕조실록』의 대부분과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영조문(迎詔門)’이라고 기록되었다. 반면에 『임하필기(林下筆記)』「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영은문(迎恩門)조에는 ‘연조문(延詔門)’이라고 기록되었다. 문이 만들어진 지 2년 후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도 연조문이 등장한다(『중종실록』 34년 4월 10일). 연조문은 기록하는 과정에서 오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1539년(중종 34)에 명나라 사신인 설정총(薛廷寵)이 조선에 들어왔다. 설정총은 영조문을 보고서 “조선에서 맞이하는 것은 조(詔)도 있고, 칙(勅)도 있고, 뇌(賚) 등이 있는데, 이름을 ‘조’라고만 한 것은 치우친 것 같다.”고 하며 새롭게 ‘영은문(迎恩門)’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편액을 썼다. 이 내용은 『동국여지비고』와 『임하필기』에 전한다. 이후 모화관 앞에 세워진 문을 영조문이 아니라 영은문으로 부르게 됐다. 하지만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에 영조문이 계속 등장하고, 인조 때 『승정원일기』에도 영조문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한경지략(漢京識略)』

관계망